'슈퍼스타 K'와 '아메리칸 아이돌'

TV 이야기 2009. 9. 5. 13:25 Posted by cinem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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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케이블 TV 채널들 사이에선 미국 프로그램 카핑이 유행인가 보다. 얼마 전엔 <프로젝트 런웨이>를 진행방식과 무대 디자인까지 그대로 수입해 알멩이만 한국인들로 바꾼 <프로젝트 런웨이-코리아>가 꽤 높은 관심을 얻은 바 있었는데, M-Net에서는 <아메리칸 아이돌>을 그대로 벤치마킹한 <슈퍼스타 K>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런 현상을 두고 미국 문화의 무분별한 수입이니, 짝뚱 또는 아류적 흉내내기라고 폄훼하는 것은 고리타분한 일일 것이다. 이미 '미국적'이라고 할 수 있는 문화 코드가 한국의 대중 문화, 특히 가요판에 깊숙이 들어와 있을 뿐더러, 이런 현상이 문화적 사대주의 운운할 수준을 훨씬 넘어 버려 아예 그 생산자들과 소비자들 사이에 암묵적으로 내면화돼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성공한 프로젝트를 들여와 한국에 접목시키는 것을 무조건 색안경 끼고 볼 일도 아니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도 있는데, 잘만 만들면 더 재미있고 더 창의적인 무언가를 제시할지도 모를 일이다. 뭐, 아무튼 슬쩍 갖다 베끼는 데 익숙한 공중파보다야 양심적이지 않은가.

<슈퍼스타 K>를 그래서 유심히 시청했다. <아메리칸 아이돌>의 심사 방식 자체가 그런 것처럼, 역시 재미있었다. 각양 각색의 사연을 가진 이들이 채 몇 분도 안되는 짧은 시간 안에 자신의 재능을 선보이는 순간에 내뿜는 어떤 절박감은 그 자체로 보편적인 감흥을 불러 일으키기 마련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지난 금요일 밤에 첫 생방송으로 진행된 최종 10명의 무대와 심사 과정은 그야말로 '짝뚱'의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말았다. 한마디로 이렇게 규정하고 싶다. 참가자들의 수준은 <아메리칸 아이돌>에 버금가는데, 진행의 수준은 한참 뒤떨어져 있다.

'소름 끼치게'라는 표현을 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참가자들이 보여준 무대 매너와 노래 실력은, <아메리칸 아이돌>의 본선 무대에서도 느낄 수 있는, 어설프지만 꽤 괜찮은 정도였다.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잘만 숙성시킨다면 대어가 될만한 이들도 눈에 띄었다. 아마추어지만 프로스러운 결기가 느껴지는 무대였다.

그런데 거꾸로 이 행사를 진행한 방송사나 진행을 맡은 '프로'들은 아마추어리즘을 드러내며 버벅거렸다. 시종 일관 큐카드를 들고 읽다시피한 사회자 임창정은 잔뜩 얼어 붙어 있고, 오디오가 더블링돼서 들린다든가, 아예 나오지 않는, 그러니까 심사의 공정성을 해칠 수 있는 치명적인 방송 사고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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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 방식도 도마 위에 올릴만 했다. 고작 10%의 심사권을 지닌 심사위원들이 거기서 근엄한 독설을 퍼부으며 점수를 매기고 있는 거야 쇼 구성적 요소이니 이해할 수 있겠지만, 인터넷을 통한 사전 평가와 문자를 통한 시청자 투표는, 물론 <아메리칸 아이돌>의 방식을 그대로 따온 것이지만, 그 막대한 위용이 갖는 설득력, 심사권 없는 심사위원들과 투표 결과 사이의 긴장감까지 따오지는 못했다.

이날 프로그램 말미에 자막으로 나타난 문자 투표 총 콜수는 1천 건을 살짝 웃돌고 있었다. 그 정도 콜 수로 대 국민 투표를 운운한다는 게 일단 웃기다. 게다가 이게 또 200원을 내야 하는 유료인데, 그렇다면 방송사는 이걸로 그날밤 고작 20만 원을 벌었다는 얘기다. 그걸로 참가자들의 운명이 엇갈리는 게 난센스인데다, 더 큰 문제는 그 문자 투표라는 게 참가자들의 실력이나 가능성이 아닌 '인기 투표'의 소지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점이다.

사실 <아메리칸 아이돌>에서도 그런 결과가 종종 나타나는데, 대신 시청자 투표 결과를 납득할 수 없다는 심사위원들의 반응이 드라마틱한 재미를 안겨준다. 시청자 절대주의가 미덕인 우리의 방송 환경에서 과연 심사위원들이 시청자 투표 결과를 냉소하는 반응을 보여줄지는 미지수다.

<슈퍼스타 K>가 제 2의 비와 빅뱅, 소녀시대를 뽑는 자리가 아니라면, 무엇보다 음악 그 자체에 천착하려는 진정성을 차별화된 형식으로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가다간 누가 탈락하고 누가 남을지 가늠이 될 정도다. 그 프로그램의 주요 타깃이 될 10대 소녀들의 마음을 움직일 누군가가 될 게 뻔하다.

실제로 예심 과정에서 가수 현미가 "몽실이 시스터즈로 묶으면 딱 좋겠다"고 극찬했던 세 명의 덩치 좋은 노래꾼들은 어느새 탈락하고 사라졌다. 실력보다 '스타성'에 더 비중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고, 이미 첫 생방송의 결과는 그 전조를 입증했다.

그렇다면, 이게 연예 기획사들의 오디션을 그냥 중계하는 것과 뭐가 다른 건지 궁금하다. 시청자 참여가 있지 않냐고? 과연 그것이 그 개념도 모호한 스타성의 관성을 뒤엎을 혁명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유감스럽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기왕 오디션 과정을 보여주면서 시청자들의 참여적 관심을 이끌도록 만들었다면, 가요계의 기류를 확 바꿀만한 참신한 접근을 가미하려는 치기를 부려본들 뭐가 대수이겠는가.

어쨌든 매우 멍청한 심사 방식을 고수하고도 <아메리칸 아이돌>은 제니퍼 허드슨이라는 대형 스타를 배출했다. 시청자 투표에서 우승을 거머쥐지 못했지만, 심사위원들의 집요한 지지와 재능을 아끼는 시스템이 뒤를 받친 덕이다. <슈퍼스타 K>에서도 과연 그런 결과가 나올 수 있을까?



(덧붙임) 행사 스폰서 때문에 참가자들이 시도 때도 없이 두부를 먹고 있는 장면은 지나치게 독창적이어서 어이가 없다. 어디 교도소에서 막 출소한 사람들이 연상돼 실소가 났다. 노래 대결과 두부라...자본의 힘이 거대하다지만 스폰서와 제작진이 테크닉 뿐 아니라 일말의 문화적 감수성만 가지고 있다면, 이렇게까지 유치하진 않을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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