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럴 줄 알았다. 목숨이 백척간두에 놓여 있는 마당에 동굴에서 사랑 놀음하고 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마다 뜬금없이, 그러나 어김없이 기습하는 유신과 덕만의 멜로 라인으로 드라마가 죽죽 늘어질 때, 나는 애꿎은 내가슴을 두드리며 소리쳐야 했다.
"무브, 무브! 백제로 튀든 서라벌로 진격하든 빨리 움직이란 말야, 이것들아!"
허나 아뿔싸! 내가 잊은 것이 있었으니 이것은 한국 드라마다. 이웃나라 일본에서조차 그 명성 자자한 '사랑했는데, 알고 봤더니 배다른 자식이더라' 레퍼토리 다음으로 흔히 쓰이는, 저 위대한 '멜로 라인으로 시청자 애간장 태우기' 신공이 주특기인, 바로 그 한국 드라마 말이다.
여하튼 드라마 <선덕여왕>의 작가분들은 시청률 올리기 노하우가 뼛속까지 사무쳐 계신 분들이 분명하다. 앞서 언급한 그 신공 말고도, 21세기적 <꽃보다 남자> 코드를 저 멀리 7세기 신라에까지 적용시키는 창의적 과감함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것이다.
슬슬 구도가 잡히는 4명의 신라판 F4, 그러니까 유신, 알천, 비담, 그리고 월야까지. 하나같이 훈남인데다, 하나 같이 덕만에 충성을 맹세하니, 이 아니 훈훈한 장면이 아닐쏘냐. 백마 탄 왕자가 하나도 아닌 무려 4명인 것을. 덕만 입장에선 금잔디가 부러울 일 없을 것이다.
과연 지난주 "동맹의 왕이시다!" 한마디에 무릎을 꿇는 뭇 훈남들의 충성 세례 대목에서 순간 시청율이 50%를 넘겼다고 하니, 남성들의 전유물일 것 같았던 액션 시대극에 여성 시청자들의 시선까지 단단히 가로채고야 말겠다는 흥행 전략이 쾌거를 이룬 순간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미실과 덕만, 두 여걸의 대결 구도에 훈남들을 조연으로 거느린 채 바야흐로 '꽃보다 남자'적 여성 판타지로 물꼬를 터주시는 우리의 <선덕여왕>!
어차피 고증이 쉽지 않은 시대이니 당대의 역학 관계를 뼈대로 실존과 허구의 인물들을 요리하며 마음껏 상상력의 날개를 펴는 게 대수는 아니겠으나, 점점 수가 들여다 보이니 살짝 김 새긴 한다. 뭐, 아무튼 좋다. 재미있게만 만들어 다오. 잘 나가다 삼각 관계나 사각 관계 삼천포로 빠져 또 질질 끌지만 않는다면, 역사적 사실이든 아니든 신라판 F4, 까짓 눈 딱감고 넘길 일이다. (기록에 따르면 그 중에 한 명은 나중에 배신을 때린다지 아마.)
기왕 수가 보인 김에 재미 삼아 28회에서 복선을 깐 다음 스토리까지 베팅해 본다. 덕만은 비담에게 "일식은 없다"고 이른 뒤 가짜 일식 날짜를 미실에게 흘리라는 특수 명령을 내린다. 비담은 덕만의 지령을 수행하기 위해 일부러 미실에게 잡힌다. 여기까지 28회. 다음 이야기에서 미실은 덕만의 술수를 눈치채고 비담이 지닌 일식 날짜가 가짜라고 믿는다. 그리고 바로 그 가짜 일식날 비담을 화형에 처하기로 한다. 그러나 불현듯 덕만이 나타난다. 사실 그날이 바로 월천이 가르쳐준 진짜 일식날인 것. 드디어 일식이 나타나고 덕만은 백성들 앞에서 '개양자(開陽者)'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입증(연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