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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 미군 방송인 AFKN(지금의 AFN)을 곧잘 봤다. 몇 안되는 한국 채널들이 방송을 시작하기도 전에 AFKN은 하고 있었고, 심지어 끝나서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쏼라 쏼라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AFKN에서 흘러나오는 이국적인 볼거리들은 (내가 싫어하던 미식축구와 레슬링 중계를 빼면) 요즘 애들처럼 학원 갈 일도 없는 초등학생의 넘쳐나는 여가 시간에 꽤 괜찮은 벗이 돼 준 셈이다.

당시(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 AFKN에서는 멋진 우주선에 심플한 유니폼을 갖춰 입은 승무원들이 등장하는 SF물이 자주 방영됐다. <스타워즈>의 감동을 새기고 있던 터에 그 시리즈는 단박에 내 시선을 가로챘지만, 영어 대사를 알아들을 길 없었던 나는, 캐릭터들의 면모만을 구경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그게 1966년 진 로덴베리가 창안한 미국의 인기 시리즈 '스타트렉'이라는 걸 알게 됐지만, TV 시리즈의 특수성과 시각효과 기술의 한계 때문인지 스펙터클은 다소 조악해 보였고, 승무원들끼리 조종실에서 토론만 엄청 해대 한편으로는 지루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쫑긋한 귀에 중세 사제와도 같은 머리 스타일을 한 인물이 눈에 띄었는데, 무슨 돌연변이거나 지구별 사람은 아닌 듯 보였다. 그 이상한 외모의 인물 역시 선장으로 보이는 남자와 허구헌날 토론을 해댔던 것으로 기억난다.

이 시리즈의 극장판이 몇 차례 국내에서도 개봉했지만, TV 시리즈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지 못했던 탓에 나는 심드렁했다. 찾아보니 지금까지 총 10편이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흥행 성과는 <스타워즈>의 그것에 필적할 수준은 못됐다. 그럼에도 미국에는 이른바 '트레키'라고 해서 시리즈에 대한 충성도 높은 오타쿠들이 적지 않다고 하니, 확실히 내가 감지하지 못했던 어떤 매력이 있긴 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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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매력을 뒤늦게나마 <스타트렉: 더 비기닝>이 확인시켰다. 부제가 보여주듯, 시리즈의 전사로 돌아간 일종의 프리퀄이기도 하고, 새로운 시리즈의 시작임을 암시하기도 하는 이 영화는 SF 특유의 쾌감으로 객석을 압도하는, 굉장히 매력적인 오락영화였다. 특히 영웅적인 활약에 힘입어 엔터프라이즈호의 함장이 되는 제임스 커크와, 지구인과 불칸인 혼혈의 부함장 스팍의 이야기는 그들의 출신 성분이 포개지면서 서사적인 입체감을 확보하게 된다. 이 과정은 <스타워즈>가 뒤늦게 다스베이더의 탄생 과정을 3편의 에피소드에 걸쳐 다뤘던 것에 필적할만한 흥미진진함을 안겨준다.  

<미션 임파서블3>의 연출자이자 <클로버필드>의 제작자로서 21세기형 스펙터클을 선보였던 J.J. 에이브람스가 메가폰을 쥔 덕분인지 <스타트렉>의 우주 액션은 호쾌하다. 게다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진보된 시각효과 기술과 시리즈의 성과를 바탕으로 SF적 창의력을 마음껏 펼쳐 놓고 있다. 광활한 우주를 배경으로 한 시간 여행과 순간 이동, 워프와 같은 흥미로운 설정들은 관객의 시선을 단박에 사로잡는다.

이제사 실감하는 것이지만 <스타트렉> 시리즈는 신대륙 개척이라는 역사적 경험의 바탕 위에 우주 개척에 대한 60-70년대 미국사회의 열망을 중첩시키는 가운데, 다인종 국가인 미국이 품은 이상주의적 정체성(함장실의 구성원을 통해 인종적 다양성과 혼혈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진보성이 엿보이지만 코캐시언의 낭만적 리더십을 통해 혈통주의를 재확인하는 보수성도 동시에 드러내 보인다.)을 SF의 틀로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디스토피아적 우울함 대신, 낙관적이고 역동적인 에너지로 가득차 있다. 외계인들을 적대시하는 게 아니라 지구인과 동급의 주인공으로 끌어 안은 설정도 새삼 마음에 든다(여승무원들이 하나같이 미니 스커트를 입고 있는 등의 설정이 좀 걸리긴 하지만).

'정복'이 아닌 '개척'을 모토로 내건 엔터프라이즈호의 항해가 11번째 극장판으로서가 아닌, 새로운 SF 연대기의 서막으로서 꽤 준수해 보이는 이유였다.

제임스 커크 역의 크리스 파인과 스팍 역의 재커리 퀸토 등 새롭고 젊은 배우들의 활약도 인상적이었지만, 악역 네로로 등장한 에릭 바나의 변신이 놀랍다. 위노나 라이더도 스팍의 지구인 어머니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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