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한국영화에도 그래픽 노블 룩이? 그렇다고 <씬 시티>나 <300>을 떠올릴 일까진 아니다. 무대 인사에 나선 프로듀서와 배우들이 입을 모아 말하듯 이건 그냥 "가볍게 웃고 즐기자고 만든" 영화다. 헌데 웃고 지나쳐 버리자니 왠지 아깝다. 불끈, '기록하는 놈'으로서의 욕심이 솟게 만드는 대목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한국영화에선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룩'을 선보이는 비주얼적 도전, 장난기 가득한 만화적 상상력, 인상적인 캐릭터들이 난무하는 이 영화, 놀랍게도 여균동 감독이 만들었다. 허나 여균동이라는 이름은 잠시 잊어도 되겠다. 이제사 <세상 밖으로>나 <미인> 등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그의 전작들을 끄집어 내는 게 미리 이 영화를 설명하는 데 별 효용이 없어서이기도 하거니와 어느 재기 발랄한 신인의 작품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영화는 재치로 넘치기 때문이다.
1724, 제목처럼 18세기 조선시대가 배경이긴 하지만, 그리고 실제로 대체로 그렇게 믿겨질만한 세트와 의상이 등장하긴 하지만,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시대극으로서의 중압감은 아랑곳없이, 그야말로 찧고 까분다. 자막이 난무하고 편집은 현란하다. 말하자면 이 영화의 시공간적 배경은 그냥 한판 걸지게 놀고 싶어하는 욕망을 위해 동원된 소품에 다름 아니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어느 싸움 잘하는 청년 천둥(이정재)이 우연히 보게 된 기생 설지(김옥빈)에게 필이 꽂힌다. 양주파 두목 짝귀(여균동)와 벌인 내기 싸움에서 얼떨결에 이기는 바람에 임시 두목을 맞게 된 천둥은 설지를 차지하기 위해 장안 최고의 실력가 만득(김석훈)과의 한판 대결을 준비한다. 약자와 강자의 대결에 팜므 파탈까지 끼어 드니 이건 처음부터 전형적으로 만들겠다고 마음 먹고 짜낸 이야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게다.
그럼에도 영화 내내 시야를 붙잡는 것은 배우들의 변신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이정재는 왠지 이런 캐릭터는 자신과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는 걱정은 붙들어매시라는 듯 어깨에 힘을 왕창 빼고 칠칠이 쌈짱 연기를 그럴 듯하게 선보이고 있다. 압권은 김석훈이다. 정극 무대에서 훈련된 연기 내공을 바탕으로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인상적인 변신을 보여준다. 한 성질 하는 기생 역을 맡은 김옥빈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짝귀 역으로 등장해 영화 초반부에 식물인간이 돼 버리는 여균동은 가끔 나와 해괴한 미소를 지은 채 그냥 누워 있다. 의미심장하다. 마치 '내가 잠들어 있던 사이 세상이 이렇게 재미있게 돌아 갔어? 그렇다면 이제 좀 따라잡아 볼까?' 하는, 중년 감독으로서의 치기 어린 작심이 서린 표정이다. 과연 그는 그 코믹한 미소만큼이나 꽤나 엉뚱하게 돌아왔다. 신대철이 설계한 음악도 영화의 분위기를 더없이 훌륭하게 북돋운다. 12월 4일 개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