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사랑 고백의 BGM, Take On Me

음악 이야기 2008. 10. 20. 23:15 Posted by cinemAgora
1986년 4월로 기억된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된 그 해, 내게 처음으로 사랑 고백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것도 아주 우연히. 그리고 그것은 다분히 장난스러운 치기의 결과물이었다.

당시 나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같은 학교 같은 써클의 M이라는 여학생이 난데 없이 프로야구 관전을 제안해 왔던 게 사건의 발단이었다. 헌데 그녀는 느닷없이 Y라는 또다른 여학생과의 동행을 요구했으니, Y는 내 초등학교 동창이자 당시 그녀의 절친한 친구 사이였기에 나는 흔쾌히 그 이상한 데이트에 응했다.

여전히 옷깃을 스며든 찬 바람을 묵묵히 견디며 지지리도 재미 없는 프로야구 경기를 보고 나온 뒤, M과 Y는 잠실 야구장 근처의 석촌호수로 날 안내했다. 나는 그날 폼 잡느라 가볍게 입고 나간 옷 덕분에 여전히 꽤 시린 봄추위에 덜덜 떨어야 했다. 평소 별 관심도 없는 프로야구를 반나절 가까이 구경하느라 몸과 마음은 이미 파김치가 돼 있었던 터라, 떨떠름한 기분으로 뒤쫓아간 석촌호수에서도 두 여학생의 '지들끼리 수다'를 멀찌감치 관전하며 터덜터덜 한 바퀴를 돌아야 했다. 소외감과 짜증이 한꺼번에 몰려 오자, 나는 여학생 두명과 한꺼번에 데이트하는 건 할 짓이 못된다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해질 무렵이 다 되어서 M과 Y와 나는 집으로 오는 버스에 함께 올랐다. 버스 안에서도 둘만 속닥속닥 수다를 떠는 두 여학생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저 또래 여학생들은 도대체 삼각 소통의 미덕을 모르는걸까?" 제일 먼저 내리게 된 나는 "안녕"하고 인사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갑자기 Y가 벌떡 일어나더니 같이 내리자고 한다. 원래대로라면 M과 Y는 다음 정거장에서 함께 내려야 해야 하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자리에 앉아 있는 M의 한마디. "네가 Y를 집까지 좀 데려다줄래? 나랑 내리면 Y는 혼자 가야 하니까 오늘 신사도 좀 발휘해봐."

어쨌든 Y와 나는 함께 버스에서 내려 M의 지시(?)대로 신사도를 발휘하기 위해 함께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뭔가 연출된 시츄에이션이라는 느낌이 든 순간, 순진한 Y가 추궁도 안했는데 먼저 털어 놓았다. "사실은 M이 네가 누굴 좋아하는지 좀 물어봐 달래. 자기가 물어보는 건 아무래도 좀 쑥쓰럽다나."

갑자기 닭살이 돋는 듯한 느낌. 친구를 활용해 우회적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타진해 보려는 M의 고전적 시도에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꾹 눌러 참고 물었다.
"내가 누굴 좋아하냐고?"
"응"
그 순간, 속에서 장난기가 꿈틀댔다.
"Y, 그렇게 묻는 너는 누굴 좋아하니? 네가 말하면 나도 말해줄게."
Y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예상과 달리 그리 오래 주저하지 않고 답했다.
"너인 것 같아."

돌이켜 보면 참 유치한 대화다. 그런데 하필 그 순간 거리의 레코드 가게에서 A-ha의 'Take On Me'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심장박동과도 같은 전주부, 충동질하는 듯한 건반의 리듬이 내 속의 무의식을 깨우는 듯한 느낌. 우리는 한참동안 말 없이 음악을 들었다. 그리고 나는 M을 배신하고 싶은 장난기의 연장선인지 진심인지 나조차 분간 못하는 심리 상태로 Y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하고 또박또박 말했다.
"나도 사실 너를 좋아해."

그날, Take On Me는 그렇게 내 유치하고 장난스러웠던 첫 사랑 고백의 BGM이 됐다. Y와 나는 다음날부터 정식으로 교제를 시작했고, M은 그 이후 나에게 말을 걸어 오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Y를 사랑하게 됐고, 기말고사 전날 그녀의 생일선물로 이 음악의 뮤직비디오를 본따 밤새도록 그림과 사진 합성 판넬을 만들었다. Y의 실사를 오른쪽에 배치하고 왼쪽에는 마치 세상 밖으로 나오고 싶어하는 만화 속 주인공처럼 나를 그려 넣었다. 다음날 아침 세수를 하는데 코피가 터졌다. 어머니는 내 목덜미를 두드리며 안쓰럽게 말씀하셨다. "아이구, 우리 아들 너무 열심히 공부하다가 코피가 다 나네."

어쨌든 Y는 판넬에 감동했고, 나는 기말고사에서 죽을 쑤었지만 기분이 좋았다.



Take on me - A-ha!



그리고...Y와 나는 2년 뒤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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