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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에 따라 스포일러라고 여길만한 구절이 포함돼 있습니다. 민감 체질의 독자들에게 권하지 않습니다.)

두기봉의 홍콩 누아르 <익사일>이 죽이게 멋있다기에 필름포럼을 찾았다. 아침 첫회여서 그랬는지 몰라도 관객은 나를 포함해 단 세 명이었다. 이런, 홍콩누아르는 평단에서만 부활했군.

여하튼 이 영화, 몇년 전의 <무간도>에 이어 모처럼 <영웅본색>과 <첩혈쌍웅> 때의 향수를 강하게 자극한다. 그러나 유위강과 마찬가지로 스타일면에서 오우삼을 계승하는 듯 다르다(적어도 비둘기를 날리지는 않는다). 감독 두기봉은 <흑사회> 시리즈로 명성을 날렸다지만, 그 명성의 증거를 이제껏 만나 보지는 못했다. 그러니까 <익사일>은 내가 본 그의 유일한 영화인데, 홍콩 누아르라는 장르가 주는 독특한 쾌감을 극단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그 폼생폼사의 미학에서만큼은 오우삼을 압도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오우삼이 80년대스럽다면, 두기봉은 확실히 21세기스럽다(아무나 할 수 있는 논평이라 미안하다). 소마가 옥상에서 피를 질질 흘리면서 린치 당하는 장면과 같은, 처연한 감정의 과잉이 여기에는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쿨하다.

영화의 메시지만큼은 홍콩 누아르의 전형을 답습하는 것으로 보인다. 평론가들의 습관적인 분석대로, 홍콩 반환 이후의 홍콩과 중국의 미묘한 관계, 방향타를 찾지 못하고 부유하는 홍콩인의 정체성 혼란이 녹아 있는 것 같기도 하다(사실 설명 듣고 보니 그렇지, 보다 보면 잘 모른다. 서양인들이 이창동의 <밀양>이나 김기덕의 <시간> 같은 영화를 보며 한국사회를 쉽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믿지 않는 것처럼, 우리가 홍콩 누아르에서 홍콩의 정치 사회적 현재를 쉽게 취할 수 있을리라 기대하는건 무리다. 다만 어설프게 짐작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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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그보다 더 확연하게 다가오는 메시지가 있었다. 한마디로, 남자들의 우정은 파멸로 완성된다는 것. 이거야말로 홍콩 누아르의 영원한 테마가 아니던가. 두둑하게 황금까지 챙겨 놓고는 죽은 친구의 아내와 아기가 붙들려 있는 악당들의 소굴로 터벅 터벅 기어들어간다. 죽을 거 뻔히 알면서 악당 보스 약올리는건지 호기롭게 즉석 사진 찍고 놀다가  보스가 던진 캔이 하늘을 붕 날았다 땅에 떨어지기 직전까지 꽝꽝꽝, 그리곤 상황 오버다. 죄다 죽는거다. 아, 이 무슨 지랄 맞은 짓거리들인가, 어렸을 때는 광분해 마지 않았던 그 다방향 총격전의 향연을 보며, 뜬금없이 이런 주책없는 생각이 스치는거다. 빛좋은 개살구지, 우정과 의리의 결과물이 기껏 공멸인 것을. 순간, 친구 믿고 보증 서줬다가 패가망신한 여러 지인들의 얼굴이 스친다. 나도 이제 세상의 쓴맛을 좀 아는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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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누아르의 멋진 부활 <익사일>은 또 하나의 단순하고도 심오한 삶의 이치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이 영화에는 남자들이 떼거리로 나오는 대신, 여자는 단 두 명만이 나온다. 악당 보스에게 죽임을 당한 친구의 아내, 그리고 시시때때로 총격전의 언저리에 있게 되는 정체 모를 창녀다. 둘은 이야기의 흐름에 크게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 가운데, 영화의 말미에 엄청나게 충격적인 방점을 찍는다. 길게 설명하자면 입 아프고, 아무튼 남자들은 죄다 죽는데, 두 여자는 각자 살.아.남.는.다. 이게 중요하다. 더 중요한 건, 황추생을 비롯한 네 명의 의리파 남자들이 한탕 해서 건진 1톤의 황금이다. 그 황금은, 당연히 살아 남은 자들의 몫이다. 그러니까 여자들의 몫이다.

기껏 우정과 의리 파먹다가 공멸하고 마는 띨빡한 남자들의 시체를 딛고 여자들은 살아 남아 전진한다. 그 질긴 생명력으로, 황금을 떠 안는다. 그러니 누가 감히 홍콩 누아르를 마초들의 영화라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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