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M 興 業 (흥 UP)


영화가 판타지라고? 지금은 어느 정도 유효한 해석일지 모르나, 출발은 그렇지 않았다. 1895년 뤼미에르 형제가 만들어낸 최초의 영화를 기억해보자.  그들은 기차가 역에 도착하는 모습을 고스란히 필름에 담아, 스크린에 재현했을 뿐이다. 초기의 영화는 그저 현실을 투사하는 거울이었다.    

1925년. 영화가 탄생한지 30년만에, 있는 그대로의 영상이미지를 스크린으로 복사하는 데 그쳤던 영화가 감독의 철학과 만나 뜨거운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그 기념비적인 작품이 바로, 세르게이 에이젠쉬타인의 '전함 포템킨'이다. 영화사에 길이 남을 만큼 뛰어난 재능을 가진 감독과 대중에게 볼세비키 혁명의 정당성을 각인시키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결합해, '영상언어의 기초'라 불릴 만한 위대한 영화적 업적이 완성된다.

이후, 영화는 단순한 '영상 이미지의 나열'에서 벗어나,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을 스크린에 투영함으로써 또다른 생명력을 얻어갔다. 그렇게 영화는 때로는 이데올로기의 붓이 되고, 사회의 거울이 되어, 극장 안에 갇힌 관객을 넘어, 사회 구성원들과 소통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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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칼라의 시인 켄 로치

미국의 스텐리 크레이머나 마틴 리트, 영국의 캔 로치와 마이클 윈터바텀, 일본의 이마무라 쇼헤이 같은 감독들이 스크린 위에 펼쳐낸 것은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강자에 짖밟힌 약자들의 절규였고, 관객들은 영화를 통해, 관념의 그늘에서 벗어나 현실성을 체득하게 됐다. 비록, 영화를 보고나온 관객들의 변화된 인식이 곧바로 '의미있는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을 지라도, 언젠가 어느 곳에서 소통의 코드가 되고, 이해의 열쇠가 되어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   by 유홍준

80년대 말. 한국의 대학가에는 '영상패'라는 집단이 있었다. '포르노 테이프'의 혁혁한 전공으로 VTR이 급격히 대중화되면서 등장한 새로운 형태의 학생운동집단이었던 영상패.

당시, 군사정권의 꼭두각시였던 언론은 오직 전경부대 뒤에서 촬영한 사진과 화면만을 내보냈다. 신문과 방송은 전경에게 '불법적인 폭력'을 휘두르는 대학생들의 모습만을 중계하고, 경찰의 폭력은 노출되지 않던 그 시대. 영상패는 VHS 비디오 카메라를 걸쳐매고, 시위대의 또다른 눈이 되어, 공권력의 무자비한 폭력을 기록하고, 전파하는 역할을 맡았다.

초창기 영화가 그랬듯, 영상패의 초기작들은 영상 이미지의 단순한 나열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렇게 촬영된 테이프들이 동아리 벽면을 차곡차곡 채워가자, 영상패들의 지식과 경험 역시, 시나브로 쌓여갔고, 급기야 1989년 한국 영화사의 기념비적 작품이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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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작, 영화 '오 꿈의 나라'. 그것은 말그대로 꿈이였고, 혁명이었다. 당시, 금기의 영역이었던 광주민중항쟁을 정면으로 다룬 장편 영화 '오 꿈의나라'는 전국의 대학가 뿐만아니라, 사회운동 전반에 큰 충격을 안겨줬다. 이듬해, '오 꿈의 나라'를 만들었던 영상패 '장산곶매'는 전설로 기억될 영화 '파업전야'를 완성했고, 90년대 초, 노동운동의 기폭제로 작용했다.

영화 '파업전야'의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고, 군사정권은 모든 공권력을 총동원해 '파업전야'의 상영을 막으려 했다. 노동현장은 물론, 대학내에서 상영하는 것 조차 허용하지 않았고, '파업전야'의 상영이 예고되면, 수만명의 전경들이 대학을 둘러싸 원천 봉쇄를 시도하고, 어렵사리 상영이 시작되면, 직격탄과 페퍼포그를 무차별적으로 쏴대는 초토화작전이 펼쳐졌다. 그렇게 영화 '파업전야'는 전설로 남았다. 오죽하면, '한 편의 영화가 세상을 바꾼다'고 믿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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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초, 세상을 바꾸기 위해, 영화판에 뛰어든 이들이 있었기에, 90년대 말부터 시작된 한국영화의 중흥기가 존재할 수 있었다. '오 꿈의 나라'와 '파업전야'를 만들었던 이은은 '공동경비구역 JSA'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으로 유명한 명필름의 이은이 됐고, 장윤현은 '접속'을 시작으로 '황진이'까지 이어지는 시네마서비스의 주축이 됐다.

같은 시기, 비슷한 행로를 거쳐 영화판에 뛰어든 이들이 바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박광수, '선택'의 홍기선, '장밋빛 인생'의 김홍준이다. 박찬욱 역시, 출발은 달랐으되, 명필름을 만나 '공동경비구역 JSA'로 황금기를 맞기 시작했으니, '장산곶매'의 동반자 내지는 수혜자였다.

어쨌든, '파업전야'로 충만해진 동력 덕분에, '탈충무로'의 표상이자, 신세대 영화인들의 탄생을 알린 '접속'의 신화가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터, 오늘날 한국영화계의 주류를 더듬어 올라가면, 어김없이 '장산곶매', 혹은, 그와 비슷한 부류의 영상집단과 만나고 만다.

하지만, 그것은 온전히 과거일 뿐, 지금은 영화를 통해 '세상을 바꾸겠다'던 기개를 온전히 간직하고 있는 영화인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한국 사회파 감독의 대표주자였던 '얄라성' 출신의 박광수 감독 조차, 철지난 신파가 아니면 메가폰을 잡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니, 한국영화계에는 더이상 사회파 감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넋두리가 결코 틀린 말은 아니다. 단순히 시대가 변했다고 하기엔 뭔가 석연치 않다. 사회파가 씨를 뿌린 영화판이거늘, 존경 받는 사회파 감독 하나 남기지 못한 이유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사회의 부조리를 까발리고, 약자의 편에 서서 기득권을 조롱하는 영화는 당연하게도 산업화된 시스템을 견뎌내지 못한다. 자본과 산업의 논리는 사회참여적 영화의 탄생을 억압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사회파 감독은 오로지 관객의 힘만으로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게 숙명이다.
노동자 계급의 강력한 지원속에 필모그래피를 쌓아 올려, 오늘날 '블루칼라의 시인'이 된 켄 로치가 걸어 온 길이 그랬고, 마이클 윈터바텀이 또다시 그 길을 따라 걸어 가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의 영화계와 관객은 사회파 감독을 키워낼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상황은 몹시 비관적이다. 주류 배급사의 파워를 십분 활용해, 한 편의 대중영화가 스크린을 싹쓸이하는 한국 영화계에 사회파 감독의 출현을 기대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게다가, '방울 토마토'와 '크로싱'의 처참한 흥행성적이 증명하듯, 한국의 관객들은 영화를 그저 '오락'으로 여길 뿐, 사회파 감독들에게 좀처럼 지지를 보내지 않는다.  

온갖 흥행코드로 무장한 대중영화가 진통제라면, 사회적 메세지를 담은 현실 참여형 영화는 보약이다. 삶에 찌든 관객들에게는 가끔 진통제가 필요하다. 비록, 2시간 남짓 이나마 그들의 짓눌린 어깨를 어루만져 줄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하지만, 돈이 된다는 이유로 진통제만을 강요하거나, 순간의 쾌락을 좇아 보약을 거부한다면, 관객은 더욱 강력한 쾌락을 찾아 헤매는 '아편쟁이'가 되고 만다. 2008년 한국의 멀티 플렉스에는 '아편'이 넘쳐난다. 우리가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린 보약은 스멀스멀 썩은내를 내뿜고 있다. 훗날, '아편'에 피폐해진 몸을 추스르려 보약을 찾아봐야 말짱 헛일이다. 보약이란 보약은 몽땅 다 썩어 문드러진 뒤가 될테니 말이다.  
 
      


Posted by PD the ripper
영화 이야기 l 2008/07/01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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