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티 보이즈' 언론 시사 후기

영화 이야기 2008. 4. 19. 12:42 Posted by cinem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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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전 사회부 사건 기자 시절의 얘기다. 밤에 경찰서 마와리(경찰서를 순회하며 취재하는 방식을 일컫는, 일본어에서 따온 언론계 속어)를 도는데, 당직 형사가 슬쩍 귀띔을 해준다. "오늘 한 건 있어. 기업형 호스트바를 불시 단속할거야." 주저 없이 데스크에 보고한 뒤 취재 지시를 받아 놓고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새벽 2시쯤 되자 경찰서 형사과는 족히 30명은 되는 남자접대부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모두들 스무살 안팎의 훤칠한 꽃미남들이었는데, 질투심이 날 정도로 잘 생긴 청년들이 떼로 몰려 있으니, 그것 자체로 구경거리였다. 지금으로 치면 장동건 스타일부터 권상우 스타일까지, 하다 못해 일본 배우 마츠모토 준 스타일까지, 외모의 경연장과도 같아 보였다.

일단 붙잡아 놓긴 했으나, 사실상 이들을 처벌할 법적인 근거는 없었다. 그건 여성 접대부들을 무조건 처벌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유다. 오직 두 가지 단속 근거는 이들이 2차, 즉 매춘까지 했느냐, 또는 미성년자인가의 여부였는데, 현장 적발이 아닌 이상 그 자리에서 매춘 여부를 인정할 리도 없고, 설령 미성년자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업주를 처벌할 일이지, 피고용인인 이들을 한꺼번에 경찰서에 가둬 놓을 일까지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경찰이 이처럼 소몰이하듯 '한 건'을 한 이유는 비교적 분명했다. 남성이 여자 손님들 앞에서 술을 따르고 민망한 행위를 일삼으며 돈을 번다는 것 자체가 사회적 통념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위법성은 둘째로 하고, 바로 그 '남자 망신 다 시키는 새끼들'을 잡아다 놓고 전시하는 게 그 단속의 사실상의 목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찰은 통념을 활용해 오늘도 열심히 뛰고 있음을 과시하려 하고, 언론은 통념의 배신자들을 향해 마치 중국 문화혁명 때의 홍위병처럼 돌을 던지고 망신 주면 되는 상부상조의 시스템. 그 부역자였던 나는 황망한 표정으로 경찰서 바닥에 쭈그려 앉아 있는 그들을 향해 선정적인 질문을 쏟아냈다. "손님으로 누가 와요? 알만한 여자 연예인 본 적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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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언론 시사회에서 <비스티 보이즈>를 보는데, 불현듯 옛날 생각이 나 스스로 새삼 부끄러워졌다. "사내 새끼가 오죽 할 일이 없으면 여자들한테 얼굴 팔고 몸 파는가"라는 남성 중심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재확인하는 작업에 참여했던, 9년전의 그 밤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 밤 내가 잊었던 것은 성별이 무엇이든 돈으로 누군가의 미소와 외모와 섹스를 사고 파는 이 사회의 잔혹성이며, 그들 꽃미남들 역시 그 욕망의 하수구로 내몰린 사회적 최약자라는 사실이다.

영화 <비스티 보이즈>는 남자 접대부들에 대한 관객들의 통념적 시선과 더불어 남성마저 기꺼이 상품화되는 진풍경에 대한 호기심에 다분히 의존할 수밖에 없는 출발점을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관객들을 그날밤 경찰서 형사과로 들어서던 내 심정과 같이 만들어 놓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셈이다. 헌데 이 영화가 남다른 것은 거기에서 머물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3년 전 <용서받지 못한자>로 병영 사회의 잔혹성을 탁월하게 묘파했던 윤종빈은 그의 충무로 데뷔작인 이 작품을 통해 소재와 공간은 다르지만 맥락에선 크게 다르지 않은 그의 문제 의식을 더욱 야심차게 밀어 붙인다. <용서받지 못한자>에서 주인공들의 관계를 파괴하고 마는 것이 '군대 사회의 형식적 위계'라면, 이 영화 속에서는 돈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돈이 주인인 사회에서 인물들은 돈의 많고 적음에 따라 자동서열화되며 권력도 바뀐다. 영화가 무대로 삼는 '서울 강남'이라는 공간은 어쩌면 정확하게 병영 사회의 연장이며 더욱 처절한 약육강식의 정글이나 다름 없다.

호스트바에선 돈을 쥔 채 호스트를 구매하는 여성들이 권력자다. 그러나 그 권력을 쥔 여성들 역시 한 두 시간 전까지만 해도 돈 많은 남성 폭군들에게 일상적인 치욕을 당했던 사람들이다. 피억압자였던 여성들은 비스트(Beast: 짐승)에 대한 복수심으로 비스티(Beastie: 작고 귀여운 동물 또는 곤충)를 구매해 억압자로서의 전복적 쾌감과 일시적 위안을 얻는 것이다.

그 모욕의 악순환 고리에서 벗어나 잠시라도 평등한 관계를 꿈꾸는 이들의 욕망은, 그러나 돈의 논리에 의해 너무 쉽게 좌절된다. 수컷의 우위를 일시적으로 포기한 대가로 돈을 버는 비스티 보이들은, 여성들이 지배하는 그 가상의 정글을 벗어난 순간, 다시 비스트, 즉 폭력적 주인 행세를 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거래를 통해 확보된 호스트 바라는 실재하는 가상 공간과 현실 사이의 불일치는 인물들 사이의 파국을 예고한다. 세상이 그러하니 그렇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세상이 그러하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하여, 윤종빈의 이 녹록하지 않은 작품을 편하게 보긴 힘들었다. 그게 감독의 당초 의도였다면, 윤종빈은 또 한번 성공한 셈이다. 여성 관객들은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궁금해진다. 4월 30일 개봉.

줄거리에 '줄'자만 나와도 경기를 일으키는 스포일러 민감성 독자들을 의식해 줄거리 소개는 아예 생략했다. 그래도 하정우와 윤계상의 연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하정우는 자신이 연기했던 <용서받지 못한자>의 유태정이 제대 후 호스트가 됐다면 딱 저런 모습일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현실 적응주의자이지만 기회주의자인 캐릭터의 속성대로 자주 얄미우면서도 종종 연민을 유발해 낸다. 윤계상은 <6년째 연애중>에 이어 이번 영화로 완전히 배우가 됐음을 재차 입증해 보인다. 그것도 연기 꽤 잘하는 배우가 됐다.

영화 초반부 호스트바로 들어서는 두 사람을 길게 찍은 장면은 두 배우와 거의 동년배인 감독이 합작한 젊은 재능의 상징처럼 보인다. 펄떡 펄떡 뛰는 생동감이 넘치는, 한국영화에서 모처럼 만나는 멋진 롱테이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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