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영화를 쉽게 볼 권리

영화 이야기 2008. 4. 5. 18:57 Posted by cinemAgora
지난 수요일 <경축! 우리 사랑>의 배우 기주봉 씨를 만나 인터뷰한 자리에 영화사 직원이 함께 나와 있길래 대뜸 물었다. "이 영화 스크린 수가 얼마나 될 것 같아요?" "글쎄요...지금 상황에선 30개 안팎이 되지 않을까..." 듣고 있던 기주봉 씨 표정에 살짝 실망의 기운이 스친다. 그럴 수밖에. 생애 처음으로 사실상 주연에 필적한 만한 비중의 역할을 맡은데다 시사회 이후 들려오는 평가들도 칭찬 일색이니 흥행 면에서 모처럼 의욕이 생기는 것도 당연한 노릇일 것이다.

기주봉 씨는 오히려 기자인 나에게 물었다. "관객들이 좋아할 것 같아요?" 나는 영화사 직원에게 시선을 돌려 질문함으로써 답변을 대신했다. "아주 잘 되면 30만 명 정도 되지 않을까요?" 직원이 화들짝 놀란다. "30만 명이요? 그 정도면 초대박이죠. 10만이라도 들었으면 좋겠어요." 정확한 현실 인식이다. 30-40개의 스크린으로 30만 명은 언감생심이다. 특히 지금처럼 극장가가 극심한 관객 가뭄에 빠져 있을 때라면...

사용자 삽입 이미지

명동 CQN


국내 유일의 일본 영화 전용관인 명동 CQN이 결국 문을 닫는단다. 종로 3가의 필름포럼도 방을 빼야 할 처지에 놓였다. 두 영화관 모두 상업성이나 대중성에 얽매이지 않는 '다른' 영화들을 틀었던 곳이다. 얼마전 독립영화 전용 상영관 '인디 스페이스'를 운영중인 원승환 소장을 만났는데 "답답하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관객이 없어도 너무 없다는 토로다. 관객 한 명 놔두고 영사기를 돌릴 때도 적지 않단다. 나 역시 필름 포럼에서 혼자 앉아 영화를 본 경우가 적지 않았으니 그 심정 이해가 된다.

집 가까운 멀티플렉스에서 천편 일률적인 영화들을 틀어 대는 사이, '다른 영화'를 볼 수 있는 많지 않은 공간들이 이렇게 시나브로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다. 이것을 두고 나는 '다양성의 게토화'라고 부르고 싶다. 다양성 영화들을 후미진 구석으로 몰아 놓고, "너희들은 여기서 만족해"라고 윽박지른 뒤, 겉으로는 "어때? 이 정도면 한국에서 영화 다양성이 꽤 보장되고 있는 거 아냐?"라고 잔뜩 생색을 내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내 경우, 집이 일산인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나 <데어 윌 비 블러드>를 보기 위해 한 시간 반이나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와야 했다. 집 주변 반경 3킬로미터 내에 멀티플렉스가 무려 3개나 있는데도 말이다. 집 주변에 무려 30개의 스크린이 하루 종일 영사기를 돌리고 있는데 아카데미 영화상 수상작을 볼 수가 없다. 설상가상으로 요즘엔 DVD 시장이 궤멸 직전이라 극장에서 실패한 영화는 DVD로 만나보기도 힘들다. 인터넷에서 도둑질을 하지 않는 이상.

사용자 삽입 이미지

구 허리우드 극장을 임대 운영중인 필름포럼과 서울아트시네마



관객들의 영화 관람 패턴은 이미 거주지 중심으로 바뀐 지 오래다. '다른 영화'에 대한 대단한 신심과 열정이 있지 않은 이상, 보고 싶은 영화를 위해 한 시간 반을 허비할 관객은 많지 않은 것이다. 찾아가는 게 힘들면 잘 찾지 않게 되는 게 당연지사다. 그런데도 한국의 영화 다양성은 종로 을지로에 삼삼오오 옹기종기 모여 앉아 손님 올 때까지 죽치고 기다리고 있는 걸로 만족해야 하는 처지다. 다양성의 게토화가 다양성의 슬럼화로 이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이런 극장에서 트는 영화들이 대규모 멀티플렉스 체인으로 흡수되지 않는다면 한국에서 다양성 영화는 머지 않아 씨가 마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한국의 영화 정책은 그러나, 멀티플렉스에게 무한의 영업 자유를 보장하되, 다양성은 별도로 지원하는 방향으로 수립돼 있다. 자유 시장 경제 원칙에 의거, 멀티플렉스에 이 영화를 틀라 말라 할 수 없으니, 그 대신 정부가 나서서 다양성 영화관을 많이 세우면 되지 않겠냐는 논리다. 딴에는 맞는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집 앞 구멍 가게 놔두고 대형 마트를 찾는 게 대세인 세상에서, 깨작깨작 몇 개의 구멍 가게를, 그것도 집에서 꽤 먼 거리에 열어 본들, 무슨 소용인가 싶다. 그나마 그 구멍 가게도 전국을 통틀어 20개 밖에 되지 않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멀티플렉스는 단순한 영업장이 아니 문화 사업장이라는 개념을 정립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세제 혜택 등의 인센티브를 과감히 주되, 그 대신 다양성을 보장할 수 있는 최소한의 책임을 지우는 게 선진적인 문화 정책이라고 믿는 것이다.

사실 이런 논의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5개 이상의 스크린을 가진 영화관을 복합상영관'으로 규정하고, 1개관 이상을 반드시 다양성 영화에 할애하도록 하는 방안이 진보적인 정치권 일각에서 검토되기도 했다(이 사실을 알고 있다면 당신은 영화 다양성을 진정으로 걱정하시는 분 가운데 한 명이다). 그러나 씨알도 안 먹혔다. 영화를,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도구 아니면 자동차 몇만대와 맞먹는 수출 상품 이상도 이하도 아닌 걸로 바라보는, 후진적 문화 의식을 지닌 정치인들이 국회를 장악하고 있어서 그렇다. 멀티플렉스 체인과 한 지붕 아래 있는 대형 배급사의 심기를 거스리고 싶지 않은 영화계도 이 대목에서 말을 아끼긴 마찬가지였다.

그 사이, 한국의 극장가는 문화적으로 점점 후진화되어가고 있다. 담론도 점점 양극화돼 간다. 한편에선 '할리우드에 맞선 한국영화의 부활' 어쩌고 하며 극장가를 한국 대 미국의 시합으로 단순화한 국가주의 담론이 위력을 떨치고, 또 한쪽에선 게토에 몰려든 소수의 평론가들이 그 게토에 동참한 극소수의 문화 엘리트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폐쇄적 소통을 즐긴다. 대중과 전문가가 문화 소비의 서로 다른 계층을 상징하는 듯한, 이상한 위화감이 만들어졌다.  

이른바 '좌파 정권'이었던 노무현 정부에서도 실현되지 않은 다양성 보호 정책이 실용적 시장주의를 전면에 내건 새 정부 하에서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 건 어불성설일 것이다. 영화를 단순한 상품이 아닌 '공공재'로 바라보아야 하며 그러므로 다양성 영화를 보호 육성할 수 있는 유통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더더욱 소귀에 경읽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따지면 더욱 절망적이다. 그러나 포기하고 갈 수는 없다. 영화인들 스스로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는 제도적 방안을 머리 맞대고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정책화를 이끌어 내야 한다. 다양성이 죽으면, 다양성 위에서 의미와 가치를 발굴해왔던 한국영화의 존립 기반도 함께 사라지기 때문이다.

,
BLOG main image
3 M 興 業 (흥 UP)
영화, 음악, 방송 등 대중 문화의 틀로 세상 보기, 무해한 편견과 유익한 욕망의 해방구
by cinemAgora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1187)
찌질스(zzizzls) (3)
영화 이야기 (702)
음악 이야기 (34)
TV 이야기 (29)
별별 이야기 (122)
사람 이야기 (13)
3M 푸로덕숀 (156)
애경's 3M+1W (52)
민섭's 3M+α (27)
늙은소's 다락방 (26)
라디오걸's 통신소 (1)
진영's 연예백과사전 (4)
순탁's 뮤직라이프 (10)
수빈's 감성홀 (8)

달력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TNM Media textcube get rss DNS Powered by DNSEver.com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최근에 받은 트랙백

3 M 興 業 (흥 UP)

cinemAgora's Blog is powered by Tattertools / Supported by TNM Media
Copyright by cinemAgora [ http://www.ringblog.com ]. All rights reserved.

Tattertools 티엔엠미디어 DesignMyself!
cinemAgora's Blog is powered by Textcube. Designed by Qwer999. Supported by TNM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