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스틱 우먼

영화 이야기 2018. 4. 10. 15:30 Posted by cinemAgora

"그리하여 둘은 결혼해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맺는 유치한 동화가 아닌 이상은, 우리가 이야기 장르를 통해 접하는 사랑은 비극이 아니고서야 성립되지 않는다. 이미 사랑이라는 감정 안에 비극적 요소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아무리 성(聖)스러운 감정이라고 해도, 필연적으로 속(俗)의 세계에도 걸쳐져 있기 때문이다.


사회는 사랑에도 등급과 자격을 만든다. 봉건 시대에는 신분 제도나 가문간의 알력 등이 그러하였다. 따라서 비극성은 자명했다. 서양에 <로미오와 줄리엣>이 있다면 우리에겐 <춘향전>이 있다.


그런데, 21세기 언저리의 영화는 어떻게 사랑의 비극성을 만들어낼 것인지 딜레마에 빠졌다. 남녀간의 사랑에서 비극을 뽑아내기에 인간의 짝짓기 환경이 지나치게 전략적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른바 '연애 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분주하게 주판알을 퉁기는 남녀의 짝짓기 전략이 불꽃 튀는 대결을 펼치는 곳. 그게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속(俗)할대로 속해져 버린, 편리하게는 서로 사랑이라고 부르되 진짜 사랑은 아닐 수도 있는 연애 관계의 보편적 풍경이 된 것이다.


우리는 과연 그걸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쩌면 속의 세계의 '유사 사랑' 이야기는 로맨틱 코미디로 분류되는 게 마땅할 것이다. 이런 유의 영화에서 남자와 여자는 밀고 당긴다. 사랑을 하지 않고 롤플레잉게임을 한다. 감정과 감정이 아닌 전략과 전략이 맞붙는다. 풍속이 그러하니 로맨틱 코미디는 명맥이 아주 길다. 그 대신 고전적 비극으로서의 사랑 이야기로부터 얻는 숭고한 감동은 기대하기 힘들어졌다. 필연적으로 성스러운 비극을 탐내는 이야기꾼들로선 아주 난감해진 것이다.


아이로니컬하게도, 현대 영화에서 고전적 사랑의 비극은 빈번하게 성적 소수자들로부터 뽑아져 나온다. 성 소수자들의 사랑이야말로, 물론 당신이 그들을 변태 취급하지 않고, '있다'고 인정만 한다면, 성(聖)과 속(俗)의 세계에 걸쳐 있음으로써 파생되는 비극성을 추출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한번 아이로니컬하게도, 그런 영화들이 도리어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를 뛰어 넘는 사랑의 진경(眞景)을 드러낸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에 빛나는 <가장 따뜻한 색 블루>가 그랬고, 캐나다의 천재 감독 자비에 돌란의 <로렌스 애니웨이>가 그랬다. 두 영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시선과 편견의 폭력을 뛰어 넘으려 애쓰고, 그러나 좌절하고 마는 구조적 부조리에 갇힌다. 그 좌절은 잔영이 매우 길다. 끝내 이어지지 못하지만 생의 너머로까지 가지고 갈만큼 깊다. 그리하여 비극이되, 숭고하다. 이야기 속의 사랑은 찬미되는 비극이다.


4월 19일 개봉하는 칠레 영화 <판타스틱 우먼>도 그 계열에 서 있다. 이 영화를 소개하기 위해 서설이 길었다. 그러나 정작 영화에 대해선 길게 설명하지 않을 작정이다. 앞에서 말한 기본 전제를 이해한 이들이라면 영화를 충분히 가슴으로 껴안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다만 이 정도만 가이드 삼아 말해 두도록 하자.


영화는 이구아수 폭포의 웅장한 풍경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주인공이 헨델의 오페라 '세르세'에 삽입된 '옴브라 마이 푸 ombra mai fu'를 부르는 장면으로 맺는다. 이구아수 폭포는 그 크기만으로도 신성함을 드러내지만 따지고 보면 중력에 굴복하는 거대한 물의 추락이다. 아주 단순한 자연 현상이다. 하지만 누가 봐도 자연이 창조한 그 규모의 미학에 압도 당한다.


어쩌면 사람의 사랑도 그토록 압도적인 자연일 것이다. 재고 따지고 밀고 당기느라 그 숭고함을 까먹어 영화로만 갈구하게 된 감정의 이구아수 폭포. 그런데 왜 영화는 하필 '옴브라 마이 푸'로 끝맺는 것일까? 노랫말에 그 힌트가 들어있을지 모른다. 여러분이 찾아보시라. (다양한 번역이 있지만 여기선 영화의 번역을 그대로 옮긴다.)


이런 그늘은 없었네
이 세상 그 어느 나무 그늘보다
소중하고 사랑스러우며
이토록 감미로운 그늘
이런 그늘은 없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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