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게 살자>, 웃길까?

영화 이야기 2007. 10. 16. 09:04 Posted by cinem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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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 감독이 제작과 각본을 맡고, 라희찬 감독이 처음으로 메가폰을 잡은 <바르게 살자>는, 주연으로 정재영까지 가세했으니 안봐도 장진 사단의 냄새가 물씬 풍길거라 예상할 수 있다. 과연 그런 것도 같다. 흔히 장진 감독의 코미디를 '엇박자 코미디'라고들 부르는데, 관객들을 웃기는 타이밍이 한 템포나 반 템포 늦게 들어가기 때문일 것이다, 라고 나는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그 말이 사실 모순이다. 코미디는 원래 엇박자라야 웃긴다. 예상대로 흐르면 재미 없지 않은가. 그러니까 그 말은 사실 장진식 코미디를 설명할 이렇다할 단어를 찾아내지 못한 저널이 대충 갖다 붙인 수사에 불과한 것이다, 라고 나는 또한 해석하고 있다.

대신, 장진 코미디가 갖는 진정한 매력은 전혀 웃기지 않을 것 같은 상황에 웃기는 대사나 행동을 슬쩍 배치하는 재치라고 생각한다. 관객의 의표를 찌르길 좋아하는 장진의 예측불허 테크닉은 좁게는 한마디 대사에서부터, 넓게는 이야기 전체로 확장되기도 한다. 역시 장진 감독이 각본을 쓴 <웰컴 투 동막골>에서는 "머리에 꽃 꽂았시유."라는 임하룡의 대사 한마디로, 인민군과 '미친년' 강혜정의 첫 조우의 긴장감을 순식간에 누그러뜨리며 폭소를 자아낸다. <아들>에서도 마찬가지다. 교도소에서 외출 나와 아들을 처음 대면하는 순간, 차승원의 대사는 감동을 자아내는 상투어를 예상했던 관객들을 슬쩍 배반한다. "아들의 눈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실은 목도리로 얼굴을 가려서 그렇습니다."(대충 이런 대사인 것으로 기억난다.) 그러니까 그는, 부조리의 미학으로서의 코미디의 본질을 배운대로 착실히 써먹고 있다는 얘기다. 가끔 관객과의 '메롱 요건 몰랐지' 게임에 너무 몰입하는 바람에, <아들>에서처럼 극단적인 반전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일본 원작 소설 '노는 시간은 끝나지 않았다'를 토대로 새로 각색 작업을 거친 이 영화 <바르게 살자>도 그런 면에선 장진 코미디의 줄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는 것 같지만, 이 말은 동시에 그래서 별반 새롭지 않은 영화가 됐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설정의 참신성은 원작에서 빌어온 것이니 그걸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말할 이유는 없고, 핵심은 코미디로서 이 영화가 얼마나 제대로 관객들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히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조금 더 바란다면, 그래서 잘 만든 코미디의 자격조건인 풍자적 희열까지 선사해주고 있느냐의 문제다. 그러니까 코미디의 기본을 갖췄다는 전제 하에 장진 코미디가 어쩌구 저쩌구 해야 한다는 말이다.

순경 정도만이 원리 원칙대로 산다는 이유로 바보 취급 당하고, 바로 그 이유로 그를 바보 취급한 세력들이 된통 당한다는 얘기렸다. 은행 강도 모의 훈련에 들어갔으면 강도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게 바르게 사는 것이라고 믿는 정도만이 군대용어로 'FM(Field Manual)대로' 하는 바람에 일이 자꾸 꼬여 간다는 거다. 그런데 그는 결코 일탈하지 않는다. 진짜 '바르게' 강도짓을 한다. 선과 악, 바름과 그름, 합법과 불법이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해프닝이다.

이건 그 자체로 코미디다. 게다가 장진 감독이 좋아하는 설정이다. 남한에 와 사면초가의 신세가 된 북한 간첩(<간첩 리철진>, 착하고 정의로운 킬러들(<킬러들의 수다>), 시한부 인생이라 착각하는 얼뜨기 야구선수와 예쁜 스토커의 괴상한 순애보(<아는 여자>), 국군과 인민군의 죽일수도 살릴수도 없는 조우(<웰컴 투 동막골>) 등 현실성은 있지만 결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요소들을 하나의 환경 안에 버무려 놓고, 그 충돌과 화해의 과정을 통해 웃음 뿐 아니라 페이소스까지 안겨줄 수 있다는 걸 장진은 잘 활용해왔다. 그러므로 이 영화 역시 시츄에이션의 얼개에서 이미 장진적 코미디라 부를 수 있는 자격조건을 한껏 갖췄다는 얘기다.
 
그런데 문제는, 이 해프닝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파열돼 나올법한 웃음을 위한 알리바이, 즉 긴장감의 강도가 고양되지 않고 이야기가 느슨하게 흐른다는 것이다. 코미디의 대전제는 완성됐는데, 소전제들이 딱 예상 영역 안에 놓여 있는 셈이다. 여기서도 장진 사단 특유의 코미디 감각은 군데 군데 엿보이긴 하지만 이제 그것조차 진부하게 보일만큼 이미 익숙한 그 테크닉은 의표를 찔린 자의 흔쾌한 폭소로 이어지지 못한다. 웃음이라는 측면에서, 어퍼컷이나 카운터 블로는 없고 잽만 날리다 마는 것이다.

그렇다고 원칙대로 살면 바보 되는 세상에 대한 통쾌한 복수극의 쾌감이 있느냐...면 또 그렇지도 않다. 말 그대로 모의 훈련이 끝나면 만사 원점으로 돌아갈 판인데...이 안전이 보장된, 그래서 애들 장난의 어른 버전과도 같은 해프닝의 풍자적 공명은 큰 스크린에 걸맞지 않게 쪼잔하게 띵띵 울리다 마는 느낌이다. 볼일 보고 휴지가 없다는 걸 뒤늦게 알아챈 뒤 엉거주춤 느슨하게 팬티 다시 걸쳐 입고 그냥 나온 기분이랄까? 그것이었다. 이 어정쩡한 코미디에서 딱히 스트레스를 풀지도 못하고, 기억에 남을만한 장면을 챙기지도 못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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