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지나가고

영화 이야기 2016. 7. 24. 16:02 Posted by cinemAgora

일본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신작 <태풍이 지나가고>는 제목부터 의미심장하다. 왜 '태풍이 지나가면'이 아니고 '지나가고'일까? 전자의 제목이라면 우리는 어떤 종류의 변화를 예감하게 된다. 태풍이 지나가고 난 뒤, 주인공의 삶과 일상에 모종의 변화가 생길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고레에다는 그냥 '지나가고'라고 썼다. 태풍은 매년 오고 23호인지, 24호인지 분간이 안되는 그 기상 현상은 그저 지나간다. 희생자가 생길 수 있지만, 대부분 태풍이 지나간 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가족 휴먼 드라마는 대중영화의 문법인 신화성을 곧잘 배신한다. 신화성을 최대한 간단하게 말하면 '주인공이 역경을 통과하면서 변화하는 과정'을 말한다. 대부분의 대중영화는 이 문법을 따른다. 인류가 가장 감흥을 얻을 수 있는 보편적 스토리텔링 작법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걸어도 걸어도>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바닷마을 다이어리>처럼 이번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에서도 고레에다는 애써 주인공의 신화적 변화나 반전을 보여주지 않는다. 흥신소에서 일하는 어느 한심한 아빠이자 전 남편이 태풍이 불어닥친 어느 밤 어머니의 좁아터진 집에서 전처와 아들과 함께 우연히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그래서 그들 가족은 감동적인 재회의 드라마를 만들어낼까? 그랬다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가 아니다.


바로 그런 무심한 일상성이야말로 고레에다가 천착하는 영화적 문법이다. 사실, 그게 우리의 진짜 삶이기 때문이다. 가족들이 모여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때론 다투고, 그렇게 부대끼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 그게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그 어떠한 작위적 감동 장치를 연출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그런 슴슴함이야말로 고레에다 영화의 진짜 매력이다. 마치 구수한 녹차 한 잔이 가슴을 따스하게 훑어내려가는 듯한 여운이 그의 영화에는 있다. 그럼에도 그의 영화는 꽤 새길만한 대사를 선사한다. 이번 영화에서도 두 개의 대사가 인상적이었다.


"남자는 누군가의 과거가 될 용기가 있어야 진짜 어른이 된다."
"행복은 무언가를 포기할 수 있을 때 얻을 수 있다."


엄청난 사건이 아닌, 보통 사람들의 보통 일상이 영화가 될 수 있음을, 그는 증명한다. <태풍이 지나가고>도 그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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