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예술대학교 강한섭 교수와 영화 <암살>을 놓고 논쟁중입니다. 일단 두 개의 글을 여기 옮깁니다.


<암살>의 쾌감을 부인하다

강한섭 (평론가)


불쾌한 여름을 보내고 있다면 이 글을 디스해야 한다. 나는 지금부터 <암살>이 주는 영화적 쾌감을 냉정하게 부인할 작정이기 때문이다. <암살>은 한국인 관객을 슈퍼맨으로 만든다. 슈퍼맨이 크립톤 행성의 에너지를 담은 망토를 입으면 빛의 속도로 날아가 악당들부터 위협받는 지구를 구할 수 있듯이 <암살>을 보는 동포들은 영사가 시작되면 시공간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신비한 힘을 부여받게 된다. 그리고 주인공들과 함께 스크린의 상상 세계를 달리면서 다음과 같이 외치게 된다. - ‘대한독립 만세!’


‘1933년 조국은 사라지고 작전은 시작된다’. 영화 포스터에 깊이 새겨진 메인 카피다. 메인 카피는 영화의 DNA를 담은 압축 파일이다. 우선 시간 디자인. 영화는 시간을 넘나드는 마력으로 1919년, 1933년 그리고 1949년이라는 별개의 시간을 연결한다. 19년의 사이토 총독 암살 사건은 논픽션이지만 1933년에 펼쳐지는 영화의 메인 사건으로서의 암살은 픽션이다. 그리고 49년의 초법적 처단도 허구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배신자에게 총탄을 발사하면서 저격수 안옥윤은 말한다. - ‘16년전 임무, 염석진이 밀정이면 죽여라. 지금 수행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해체하는 가혹한 시간이 대중영화의 연속적이고 직선적이며 순차적인 시간으로 재탄생되는 순간이다.


영화적 공간을 부호화하는 기술도 만만치 않다. 미션이 실행되는 공간은 한반도의 경성이지만 미션이 결정되고 암살조가 만들어지는 곳은 중국의 상해와 만주다. 여기에 하와이 피스톨이 초대되어 카페 미라보에서 로맨스가 싹트고, 아일랜드 계림호 열차는 암살조를 경성역에 내려놓는다. 그러면 엇갈린 운명의 쌍둥이 자매가 조우하고 피의 결혼식이 펼쳐질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점의 화려한 샹들리에가 빛을 밝히기 시작한다. 관객의 몸은 어두운 공간의 의자에 묶여 있지만 관객의 마음은 땅을 접고 공간을 압축하는 축지법을 사용하여 한반도와 유라시아 대륙 그리고 세 개의 섬을 영화와 함께 연결한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상상적 지배력을 가지고 관객은 이제 3인조 암살단과 함께 조선주둔군 사령관 카와구치 마모루와 친일파 기업인 강인국을 처단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이제 하나의 무명인으로서의 개인 관객은 ‘큰 타자’인 민족과 하나가 되어 한국인으로 재탄생되는 신기한 서사의 자장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몇 사람 처단한다고 사라진 조국이 다시 나타나냐는 빈정거림에 안옥윤은 낮지만 결의에 찬 목소리로 대답한다. -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 이것이 <암살>이 주는 영화적 쾌감의 전모다. 영화는 이렇게 국민영화 급의 건강한 영화적 쾌감을 주는 영화로 포장되어 있다.


그러나 <암살>은 그냥 한 편의 대중영화가 아니다. 순제작비만 150억 원이 투자된 한국판 블록버스터 기획 상품이다. 손익분기점은 관객 600만명 정도지만 거대 자본의 목표는 천만 관객을 동원하는 대박 영화다. 거대 자본은 ‘친일파 암살을 둘러싼 엇갈린 선택과 운명’이라는 스토리에 움직이지 않는다. ‘민족은 하나고 영원하다는 환타지’라는 콘셉트에도 움직이지 않는다. 자본은 말한다. ‘오천년 역사, 삼천리 강산, 3천만 동포로 연결되는 스토리는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상식이고 환타지야. 그러니 2015년에 다시 조국과 민족을 호출하는 너의 실행 코드를 밝혀봐?’ 최동훈 감독은 10여 년 전 어느 독립투사의 사진을 보고 시간이 멈추는 ‘기묘한 정적의 순간’을 느꼈고 영화를 만들 것을 결심했다. 그러나 자꾸 연기됐다. 연기의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돈, 캐스팅, 아이디어인가? 그런 것들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2015년 7월 최동훈 감독이 공개한 조국과 민족의 환타지 서사를 거대한 스크린에 확대 표상하는 실행 코드는 ‘역사의 오락화’이고 기본 이미지는 ‘장총 든 미녀 저격수’다. 감독은 철저하게 거의 강박증 환자처럼 이 코드의 원칙을 준수하여 실천한다. 그래서 암살 작전 모의에서도 유머 코드가 삽입된다. 하와이 피스톨은 로맨스를 위해 설정되고 서사적으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 영감은 그냥 웃기기 위해 등장한다. 삼엄한 경비망이 처진 경성역에 내리면서 암살단은 저격용 모신 나강 소총을 커다란 박스에 넣고 들어온다. 여기에 총이 들어있다며 외치는 격이다. 고독한 저격수의 방아쇠를 당기는 장면 하나면 족할 암살 장면은 시가전으로 변해 할리우드 액션 영화의 자동차 추격과 군중 장면으로 긴박감 있게 보여준다. ‘역사의 오락화, 오락의 역사화’는 블록버스터 영화를 만드는 최소 조건이 아니고 영화의 중심 주제와 본질로 변한다.


그래서 영화 <암살>의 쾌감의 발원지는 민족과 조국이 아니라 깨진 안경, 모신 나강 소총, 포드 클래식 자동차와 같은 사물에 대한 매혹이거나 1930년대 상하이를 지배했던 ‘붉은 화려함’이나 담벼락을 건너뛰고 자동차 난간에서 총격전을 벌이는 속도와 사운드에 대한, 바로 스펙터클에 대한 전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물론 쾌감의 절정은 부드러운 얼굴 곡선과의 대비로 더욱 시각적인 이정재의 가슴과 스웨드 재질의 롱 코트 속에 꿈틀거리는 하정우의 몸 그리고 장총의 탄환집을 두른 전지현의 긴 허벅지에 대한 몰입에서 나오는 것이다. 즉 <암살>의 쾌감은 생명이 없는 사물이나 육체의 한 부분에 대한 집착을 통해 발산되는 페티시즘이라는 왜곡되고 분열된 쾌락이다. 최동훈 감독은 미술과 의상 감독에게 ‘실제보다 화려하게, 어지러울 정도로 화려하게,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힘을 담은 무서운 공간’을 주문했다. ‘역사의 오락화’는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를 뛰어넘는 ‘리얼리티의 판타지화’를 거쳐 팩트와 주장의 경계를 무시하면서 마침내 진실과 거짓의 구분을 무시하는 ‘오락의 역사화’에 도달했던 것이다.


그래서 <암살>의 비밀을 드러내는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안옥윤이 아니라 그의 쌍둥이 자매 미츠코다. 미츠코는 아버지에게 사살되기 전에 대사인지 독백인지 말한다. “나도 독립운동가들 좋아해. 근데 우리 아빠도 좋아. 여긴 다 이렇게 살아. 독립운동가들 좋지만, 어쨌든 너는 안했으면 좋겠어”. 미츠코의 진술은 블록버스터 영화를 선택한 일천만 관객의 마음을 대변한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읽어야 한다 - ‘나도 독립운동가 영화 좋아해. 근데 신나는 영화가 더 좋아. 그러니 무조건 신나는 영화를 봤으면 좋겠어’. 미츠코는 아버지 강덕진이 실수로 죽인 것이 아니라 영화의 비밀 코드, 바로 관객의 분열된 무의식의 정체를 무심결에 폭로했기 때문에 사살된 것이다. 또는 타짜와 도둑들과 노는 처지지만 마음속에 깊은 아티스트의 허무를 간직한 최동훈의 고독한 자아가 죽인 것이다.


감독은 미츠코를 즉결 처분하고 관객의 분열된 욕망대로 전지현은 이쁘게, 하정우는 카리스마 있게, 이정재는 야비하게 보여준다. 멋있고, 코믹하고, 슬프고, 낭만적이며 게다가 감동적인 영화를 원하는 관객의 복합적 망상증을 존중하여 음모와 배신에 로맨스까지 섞어 액션활극을 만든 것이다.



'역사의 오락화'는 지탄받아 마땅한 것인가.
강한섭의 <암살> 비판에 대한 반론

최광희 (평론가)


강한섭 평론가가 쓴 '<암살>의 쾌감을 부인하다'는 글은 쾌감을 부인한다고는 하지만, 쾌감의 정체를 기가 막히게 분석하고 있다. 그는 <암살>이 만들어내는 영화적 쾌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묘파하고 그 실체가 '역사의 오락화'라고 규정한 뒤, 그것을 '부인'한다. 실체를 알아야 부인도 가능하다. 그러므로 강한섭 평론가의 글은 매우 의미심장하고도 유의미하다. 역설적으로 <암살>을 더욱 다층적인 시각으로 곱씹을 수 있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한번 역설적이게도, 나는 거꾸로 강 평론가의 글 때문에 <암살>이 꽤나 잘만든 영화라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또한 꽤나 유효한 영화라는 생각도 강화됐다.

그럼에도 굳이 반론을 쓰는 것은, 역사에 대한 지나친 엄숙주의의 냄새가 나는 그의 큰 전제에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글에는 역사의 오락화가 가져올 역기능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한 언술이 결여돼 있기 때문에, 나는 역사의 오락화가 왜 비판받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어리둥절하다. 역사는 늘 교과서에서 근엄하게 자리 잡고 있거나, TV 다큐멘터리의 장중한 내레이션으로만 재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E.H.CARR의 유명한 선언처럼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 없는 대화"이며, 영화는 역사와 상상력의 끊임 없는 대화이다. 즉 영화는 영화적 쾌감을 통해 역사를 실어 나른다. 팩트와 허구를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는 오롯이 그 쾌감을 위해 존재하며, 주인공들의 동선과 장면의 역동성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역시 관객들이 원하는 시청각적 쾌감을 위해 봉사한다. 그것은 매우 지당한 영화적 욕망이다.


강한섭 평론가는 거대 자본의 욕망이 역사의 오락화를 야기한 근본 원인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 같다. 대중 영화 가운데 자본의 욕망이 거세될 수 있는 작품이 있을까? 그 욕망은 당연히 이윤의 추구이며, 이윤의 추구는 관객들이 영화로부터 얻고자 하는 판타지와 관음증적 쾌감의 함수, 영화 산업의 전통 안에서 발견된 함수에 스토리와 캐릭터, 내러티브를 대입시키는 것이다. 그 대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감독들이 수두룩한 마당에, 최동훈은 그나마 수학이 진정으로 좋아서 너무 잘하는 모범생처럼 딱딱 대입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그 성공의 결과는 강한섭 평론가의 글 전반부가 매우 휼륭하게 분석하고 있다.)


쾌감의 정체를 '역사의 오락화'라고 규정하여 영화 <암살>의 대중영화적 의도 자체를 부인한 강한섭 평론가는 그것을 "생명이 없는 사물이나 육체의 한 부분에 대한 집착을 통해 발산되는 페티시즘이라는 왜곡되고 분열된 쾌락"이라고 규명한다. 그 구체적 근거는 다음과 같다.


"영화 <암살>의 쾌감의 발원지는 민족과 조국이 아니라 깨진 안경, 모신 나강 소총, 포드 클래식 자동차와 같은 사물에 대한 매혹이거나 1930년대 상하이를 지배했던 ‘붉은 화려함’이나 담벼락을 건너뛰고 자동차 난간에서 총격전을 벌이는 속도와 사운드에 대한, 바로 스펙터클에 대한 전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물론 쾌감의 절정은 부드러운 얼굴 곡선과의 대비로 더욱 시각적인 이정재의 가슴과 스웨드 재질의 롱 코트 속에 꿈틀거리는 하정우의 몸, 그리고 장총의 탄환집을 두른 전지현의 긴 허벅지에 대한 몰입에서 나오는 것이다."


기가 막히게 맞다. 이것이 <암살>이 역사의 오락화를 위해 동원한 요소들이다. 그리고 관객들은 거기에 열광한다. 그러나 관객들이 열광하는 지점은 바로 그것 뿐일까? 앞서 언술한대로, 역사의 오락화는 대중 영화의 필연이다. 중요한 것은, 그 오락화 또는 설계된 쾌감이 어떤 주제 의식을 실어 나르고 있느냐인 것이다. 그러니까 일제강점기의 중국과 경성이라는 시공간의 상상적 재배치와 장총을 든 전지현의 긴 허벅지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냐는 것이다. 관객들이 오로지 거기에 도취돼 역사의 왜곡된 해석과 리얼리티의 상실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보는 것은, 평론가의 엘리티시즘적 기우일지도 모른다. 어떤 영화든, 특히 한국영화는 그것이 스펙터클의 전율만을 제공한다고 해서 대중과의 광범위한 접점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거기에는 반드시 '역사성'이라는, 대중의 공유된 기억과의 화학작용이 작동한다. 그것이 내가 <암살>이 단순히 역사를 오락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는 맥락적 전제이다.


최동훈의 <암살>은 1949년 반민특위의 친일파 청산 실패에 이은 사적 응징이라는 판타지를 가미하고 있다. 이 지점이 중요하다. 청산의 실패에 대한 응어리, 그것을 있는 그대로, 그러니까 찜찜하게 보여주지 않고 완결적으로 해소시키는 선택을 한 것이다. 사실 영화는 앞서 강인국을 처단한 지점에서 멈출 수 있었다. 그러나 최동훈은 약 20여 분에 가까운 러닝 타임을 더 쓴다. 어찌보면 사족과도 같은 엔딩 신을 덧붙이기 위해서다. 그것도 역사적 사실에 반은 걸쳐 있고 반은 순전히 상상에 걸쳐 있는 엔딩이다. 이런 걸 흔히 말하듯 감독의 '인장'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나는 이것이 최동훈이 대중영화의 속성과 한계를 동시에 품으며 만들어낸 '열망'적 인장이라고 본다. 그는 청산되지 않은 과거의 악을 불러내 상상력을 동원할 수 있는 영화 매체를 통해 매질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장면은 리얼리티를 훼손한 것일까? 리얼리티는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데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허구의 자조는, 청산되지 못한 과거사에 대한 슬픈 대리 만족이다. 그렇게라도 응어리를 풀고자 하는 처연한 판타지다. 그리고 최동훈이 그 무리수의 장면을 밀어 붙인 것은 자신의 의도가 관객들의 미완의 열망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게 성공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역사 의식의 리얼리티'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최동훈이 한국 근현대사와, 그에게 주어진 영화라는 무기와, 관객들의 공유된 기억과 무의식적 열망 사이에 놓인 함수를 꽤 근사하게 풀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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