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스텔라' 지성적 SF

영화 이야기 2014. 11. 4. 14:30 Posted by cinemAgora



영국의 논리주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1872-1970)은 인간이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선 의지와 지성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파한 바 있다. 

“의지에는 악을 피하고 비현실적인 해결책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세가 포함된다. 지성에는 그 악을 이해하고, 치유가 가능하다면 치유책을 찾아내고, 만일 불가능하다면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되 그것을 벗어난 다른 영역, 다른 시대, 행성간의 공간에 놓인 심연들에는 무엇이 놓여 있나를 되돌아봄으로써 그 악을 참고 살만한 것으로 만드는 일이 포함된다.”

이 글귀에서 ‘행성간의 공간에 놓인 심연‘이라는 말이 도무지 무슨 뜻인지 몰라, 나는 의아했다. 그런데 그 의문에 대한 일말의 답을 제시하는 듯한 영화를 최근에서야 만났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터스텔라>다. 제목을 풀어 쓰면, ’행성간의 공간‘이다. 

과연, 이 영화는 말 그대로 행성 간의 공간을 탐험하는 인간들의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물론 영화는 이 자들이 도대체 왜 행성 간의 공간을 떠다녀야 하는지에 대한 서사적 동기를 전제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지구는 황폐해졌고, 시도 때도 없이 끔찍한 황사가 불어닥치며, 병충해로 인류는 극심한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다. 우주 안에서 지구를 대신할 새로운 공간을 찾아내야 한다. 그곳을 찾아내는 게 크리스토퍼 놀란 버전의 ‘스페이스 오딧세이’가 짊어진 임무다. 

신화는 영웅의 여정이다. 신화 속에서 영웅은 보통 세상에서 특별한 세상으로 나아가며, 묘약이든 깨달음이든 어떤 종류의 보상을 획득한 뒤 다시 보통 세상으로 귀환한다. 숱한 영화들이 바로 이런 신화적 구성을 따르고 있다. <인터스텔라>도 예외가 아니다. 달리 말하면 스토리의 전개에 새로울 게 없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특별한 것은, 바로 그 신화적 여정에 현대 물리학을 선원으로 초대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웜홀과 블랙홀, 상대성 이론이 동원된다. 그리고 그것은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화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 과학적 지식을 탑재해야 하는 것일까? 그럴 필요가 없다. 영화는 정서를 창출하는 매체이지 지식을 전달하는 매체가 아니다. 어찌보면 이 영화가 동원하는 숱한 과학적 배경 지식은, 딸을 두고 무중력 공간으로 떠나야 하는 주인공 쿠퍼의 험난한 여정을 우주적으로 확대하는 특수성을 부여하는 장치임과 동시에, 그것이 갖는 함의로부터 더할 나위 없이 강력한 보편성을 뽑아내는 장치이기도 하다. 

우리의 상식에 시간은 과거로부터 걸어와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똑같은 단위로 한걸음씩 쭉 뻗어 나간다. 시간의 지속성과 영원불멸성은 인간의 유한성을 확증한다. 시간이야말로 인간의 비극성, 또는 원초적 부조리의 근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의도적으로 시간이라는 개념을 왜곡한다. 왜곡되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시간 개념이다. 그러나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지평 속에서 시간이 실제로 왜곡되는 초현실적 세계가 존재할 수 있음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그의 전작 <메멘토>와 <인셉션>이 인간의 기억과 무의식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시간의 의도된 왜곡을 보여줬다면, <인터스텔라>에서 놀란이 보여주는 도발적 상상은 대담하게도 유한성을 거역하는 윤회론적 경지에 다다른다. 

하지만 그것은 거창한 얘기가 아니다. 상식이 지배하는 일상 세계와 우주 공간의 미스터리함이 결코 차원이 완전히 다른 얘기가 아니라는 게 그가 드러내는 탁월함이다. ‘행성 간의 공간에 놓인 심연’에서 그가 발견해, 아니 상상해 제시하는 것이, 속인들의 무식을 깨우치려는 지사적 제스처, 혹은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형이상학적 선문답이 아니라는 것 또한 역설적으로 경이롭다. 이 영웅 신화는 형식적으로는 소박하게 출발해 거창하게 돌아오지만 내용적으로는 거창하게 출발했다가 소박하게 돌아온다. 과학으로 출발해 인문적 상상의 웜홀을 통과해 일상 세계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다. 

버트런드 러셀의 논리를 들이댄다면, <인터스텔라>는 더 없이 지성적인 영화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인간에게 드리운 악을 참고 살만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데 복무하는 지성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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