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칼렛 요한슨 찬가

영화 이야기 2014. 9. 3. 12:34 Posted by cinemAgora


미켈란젤로는 말했다. “조각이란 돌덩어리에 갇힌 형상을 끄집어내는 일이다.” 이 말은 오늘날 영화 감독과 배우의 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는 듯하다. 이를테면 우디 앨런 감독의 <블루 재스민>에서 케이트 블랜챗은 이미 돌덩어리에 갇힌 형상이었고, 우디 앨런은 그 준비된 돌덩어리의 필요 없는 부분을 깎아낸 미켈란젤로와도 같았다. 이런 배우들은 감독에게 축복이다. 이미 충분히 준비돼 있는 배우들에겐 굳이 캐릭터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직관적으로, 또는 숙련된 본능의 힘으로, 카메라 앞에 서면 거의 자동 반사적으로 영화가 묘사하려는 캐릭터가 되고 만다. 

스칼렛 요한슨도 의심의 여지 없이, 그런 배우다. 이제 갓 서른이 된 이 젊은 여배우는 지금까지의 필모그래피를 통해 이미 많은 것을 보여줬다. 최근 할리우드에서 제니퍼 로렌스가 20대 초반의 나이로 주목을 받고 있다지만, 스칼렛 요한슨은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2003)에 출연한 19살 때부터 이미 될성부른 떡잎이었다. 말하자면 그녀는 영화계의 원조 ‘아델’이었다. 그 해 스칼렛 요한슨은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도 나왔다. 두 영화로 그녀는 골든글러브 여우주연상 후보에 동시에 오른다. 그리고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로 골든글로브 뿐만 아니라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까지 품에 안는다. 그녀의 찬란한 출발선을 장식한 두 편의 영화는 의미 심장하다. 한편은 빌 머레이와 함께 일본의 도쿄를 무대로 한 현대극이고, 한 편은 콜린 퍼스와 함께 한 시대극이다. 두 작품에서 스칼렛 요한슨은 아주 극단적으로 다른 두 캐릭터를 소화한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샬롯은 담백하되, 자기 욕망에 솔직한 전형적인 도시 여성이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서의 그리트는 청순미와 신비로운 매력을 간직한 수줍은 하녀다. 완전히 상반된 두 작품을 통해 스칼렛 요한슨은 인정 받는 배우들이 갖추고 있는 그것, 즉 ‘입체성’을 단박에 증명한 셈이다. 

입체성은 대단히 중요한 배우의 미덕이다. 하나의 캐릭터 안에도 무수히 많은 특징과 개성이 숨어 있다. 이를테면 <대부>의 알 파치노는 소심하면서도 냉철하고, 때로는 잔인하며, 어떤 때는 인간적인 모습의 마이클 콜리오네를 표현해 낸다. 깊은 내면에서부터 얼굴 표정과 손짓으로 드러나는 표면적 행동의 수준까지, 인간에겐 어떤 심도가 있다. 실존적 고독 속에 갇혀 있을 때의 표정과 사회적 관계 안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나누는 대화 속의 표정은 다르다. 하물며 영화 속의 캐릭터는 더욱 입체적이다. 누구든 단 하나의 특성으로 규정지을 수 없듯, 훌륭한 영화 캐릭터는 복잡하고 중층적이며, 따라서 입체적이다. 이것을 한 사람이 모두 드러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그는 작가의 의도에 따라, 즉 작가가 머리 속에 그려 놓은 캐릭터를 뛰어 넘는 형상을 띄고 돌덩어리 속에서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는 조각이 될 자격을 갖추고 있다는 얘기다.

스칼렛 요한슨의 입체성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그녀가 21세기의 마릴린 먼로이기도 하고, 잉그리드 버그만이기도 하며, 오드리 햅번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정말 그렇다. 어떤 영화에서 그녀는 너무나 요염하고, 어떤 영화에서 지나치게 청순하며, 또 어떤 영화에서는 숨이 막힐 정도로 뇌쇄적인 매력을 발산한다. 스칼렛 요한슨에게 얼굴 뿐만 아니라 신체조건은 배우로서 대단히 중요한 장점이다. 그녀와 대비되는 배우를 굳이 찾자면, 키이라 나이틀리다. 약간 마른 그녀의 몸은, 묘하게도 시대극에도 어울리고 현대극에도 어울린다. 반대로, 풍만하고 볼륨감 넘치는 스칼렛 요한슨은 다른 맥락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키이라 나이틀리는 ‘고전적인 우아함’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규정성의 범주 안에 있다면, 스칼렛에겐 그게 없다는 얘기다.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매혹, 또는 매력이 그녀에겐 있다. 

과연, 스칼렛 요한슨의 필모그래피는 그녀가 증명한 입체성만큼이나 역동적이다. 그녀는 <아일랜드>(2005)와 같은 SF, <어벤저스>(2012) 같은 슈퍼 히어로 영화는 물론, 우디 앨런의 <매치 포인트>(2005)나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2008) 같은 치정 멜로, <블랙 달리아>(2006)와 같은 누아르, <천일의 스캔들>(2008)과 같은 시대극, <돈 존>(2014) 같은 코믹 멜로의 조연까지, 장르와 캐릭터를 불문하고 달려 왔다. 그리고 그 때 그 때 필요한 형상으로 자기 자신을 빚어냈다. 철 없이 막 나가는 10대에서부터 남자들의 이성을 마비 시키고 마는 팜므 파탈, 몸에 딱 달라붙는 라텍스 옷을 입고 맹활약을 펼치는 슈퍼 히어로까지, 거칠 게 없는 행보를 보여줬다. 한마디로 닥치는대로 한 것 같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그것도 아니다. 다시 한번 키이라 나이틀리와 비교한다면, 키이라가 최근 다소 엉뚱한 작품 선택으로 필모그래피를 살짝 망치고 있다면, 스칼렛은 매우 영리하게 인디와 블록버스터를 오가며 연기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이것을 영리하다고 봐야 할까, 자유 분방하다고 봐야 할까. 어느 쪽이 됐든 스칼렛 요한슨이 이미 배우로서의 굳건한 브랜드 파워를 만들어냈다는 데 토를 달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나는 부지런해도 너무 부지런한 스칼렛 요한슨의 작품 행보 가운데서도 특히나 우디 앨런의 <매치포인트>와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의 그녀를 더욱 사랑한다. 우디 앨런의 두 영화 속에서 스칼렛 요한슨은 가장 빛난다. 물론 많은 이들이 <어벤저스>의 블랙 위도우로 그녀를 더 많이 기억하겠지만, 우디 앨런 영화 속의 그녀는 슈퍼 히어로 영화가 불륨감 넘치는 외모적인 매력을 뽑아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매치 포인트>에서 스칼렛은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가 연기한 크리스 윌튼과 불장난과도 같은 사랑에 빠져든 여인 노라를 연기했다. 노라는 이미 엄청난 갑부인 톰의 약혼녀임에도 불구하고, 테니스 강사인 크리스의 은밀한 구애에 넘어가고 만다. 신분 상승의 욕구로 가득찬 크리스는 톰의 여동생인 클로에와 결혼해 놓고, 노라와의 밀애를 즐긴다. 부도 갖고 싶고, 사랑도 잃고 싶지 않은 그의 이중 플레이에 의해 노라는 결국 희생양이 되고 만다. 이 영화 속에서 스칼렛 요한슨은 사랑에 중독돼 버린 한 가련한 여인, 그러나 한편으로 속물적인 크리스와 뭔가 잘 어울리는 파트너로서의 노라를 탁월하게 연기해 낸다. 

이 영화를 통해 스칼렛 요한슨이라는 조각을 만난 우디 앨런은 이후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에서 그녀를 다시 캐스팅한다. 이번에는 빚이라도 갚는 심정으로, 남자에게 유린 당하는 역할이 아니라 남자를 유린하는 역할이다. 친구와 함께 바르셀로나에 놀러 왔다가 매력적인 화가 후안(하비에르 바르뎀)에게 꽂혀 버린 크리스티나가 그녀의 역할이다. 자기 욕망에 더 없이 솔직한 이 당돌한 처녀는 후안과 살림을 차려 버린다. 그러나 후안의 전처 마리아(페넬로페 크루즈)가 나타나면서 상황은 희한한 국면으로 접어든다. 이제 두 여자가 후안을 뒤로 한 채 서로에게 빠져 든다. 두 영화의 설정은 사뭇 상반돼 있지만, 따라서 스칼렛 요한슨이 연기한 캐릭터들의 처지도 다르지만, 묘하게도 두 상반된 캐릭터를 연기한 스칼렛 요한슨은 남자를 단숨에 제압하고 마는 매혹의 아이콘이라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다. 그리고 그녀가 그런 여자로 나와도 수긍하고 연민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다른 차원의 매력을, 그녀는 발산한다. 이토록 얄밉도록 아름다운 배우도 참 드물 것이다. 

자, 이제 그녀의 최신작 <루시>로 가보자. 이번엔 프랑스의 흥행술사이자 백전노장 뤽 베송 감독이다. 이 영화 속에서 스칼렛 요한슨이 연기한 루시는 <매치 포인트>의 노라와 <어벤저스>의 블랙 위도우를 뒤섞어 놓은 듯한 모습이다. 그러니까 조금 맹한 듯하다가, 어느 순간 피도 눈물도 없는 총격 액션을 선보이는 캐릭터로 급선회한다.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스칼렛 요한슨은 마치 터미네이터가 된 듯한 ‘무표정의 표정’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지금까지 그녀의 영화에서 한번도 보지 못했던 모습이다. 뤽 베송의 입장에서 본다면 <루시>의 스칼렛 요한슨은 <레옹>의 마틸다(나탈리 포트만)와 <제 5원소>와 <잔다르크>의 밀라 요보비치를 뒤섞어 놓은 듯한 모습이지만, 역시나 후반부의 스칼렛 요한슨은 뤽 베송의 이전 영화 속에서도 본 적 없는 모습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선에서 영화 <루시>를 간단히 소개하겠다. 뭔지 모르지만 어두운 세계에 발을 들여 놓은 듯한 남자와 어쩌다 애인이 된 지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은 루시. 어느날 남친으로부터 가방 하나를 누군가에게 전달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처음엔 이 어처구니 없는 부탁을 거절하지만 남친은 돈으로 루시를 설득하려 하고 계속 말을 듣지 않은 루시와 가방을 수갑을 채워 연결해 버린다.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에서 루시는 어쩔 수 없이 남친이 가방을 건네라는 미스터 장(최민식)을 만나러 호텔 안으로 들어선다. 그러나 이것은 지옥으로 가는 문이었다. 장은 마약 사업을 하는 한국의 냉혈한 조폭 두목이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루시는 장의 마약을 운반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장은 마약을 그녀의 뱃속에 감추는 데, 이게 결국 루시의 운명을 뒤바꿔 놓는다. 

영화 <루시>는 액션 누아르와 지적인 SF가 한 데 엉켜 있는 흥미로운 영화다. 마치 <레옹>으로 시작했다가 <인셉션>으로 다가가는 듯한 내용이다. 달관의 경지에 이른듯, 뤽 베송은 이 독특한 영화를 통해 만물의 영장으로서 인간 생명과 지적 능력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설파한다. 그러나 노장이 된 적지 않은 감독들이 걷는 길과는 사뭇 다르다. 쓸데 없이 현학성을 들이대며 설교하지 않고, 장르적 쾌감을 동원하며 영화적 재미를 통해 설득하는 방식을 택하는 것이다. 한국 배우로서 이 영화에 출연한 최민식은 마치 <레옹>의 개리 올드만처럼 극악무도한 악당 역할을 무리하지 않게 소화해 냄으로써, 뤽 베송의 연출과 스칼렛 요한슨의 원톱 연기를 동시에 빛나게 해주고 있다. 

어쨌든 <루시>는 스칼렛 요한슨의 필모 그래피에서 남성이 상대역으로 전제되지 않는 드문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미 심장하다. 팜므 파탈이든 청순한 글래머든, 라텍스를 입은 슈퍼 히어로든, 지금껏 스칼렛 요한슨이 연기한 역할들이 대개 남자의 시선을 전제로 한 모습이었다면, <루시>는 캐릭터 이름을 그대로 영화 제목으로 채택한 바와 같이, 온전히 스칼렛 요한슨의 영화다. 서른이 된 스칼렛이 <루시>에 이르러 그 어떤 사회적 관계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선택의 자율성을 누리며 인간의 최고 능력치를 발휘하는 인물을 연기했다는 것은, 뭔가 상징적이다. 스칼렛 요한슨은 자신의 배우 인생에서 또 한번 껍데기를 벗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차원이라면 <루시>는 더 없이 적절한 영화가 아닐 수 없다. 


20대의 스칼렛 요한슨이 미켈란 젤로가 말한 바, ‘숨겨진 돌 속의 조각’임을 입증해 왔다면, 이제 그녀를 더 유연하고 견고한 ‘찰흙’이라고 비유하는 게 적절할 것 같다. 어찌됐든 감독과 관객을 동시에 흥분시키는 여배우라니, 나는 그녀가 할머니가 될 때까지 연기를 계속 했으면 좋겠다. 그 때도 변함 없이 섹시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깊은 통찰을 얹은 섹시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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