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언덕' 순차성에 대한 거역

영화 이야기 2014. 8. 30. 20:17 Posted by cinemAgora

홍상수 감독의 신작 <자유의 언덕>(9월 3일 개봉)은 그의 전작 가운데 이를테면 <하하하>(2009)처럼 액자식 구성을 취하고 있다. <하하하>가 김상경과 유준상이 막걸리를 마시며 통영에서의 추억(?)을 회고하는 방식이라면, 이번 영화 <자유의 언덕>은 권(서영화)이라는 여자가 모리(카세 료)라는 일본 남자로부터 받은 편지를 읽으며 편지 내용이 재구성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시간의 순차성을 거역하는 일종의 비선형적(Non-Linear) 서사 구조를 보여준다. 이걸 정당화하기 위해 권이 모리로부터 받은 편지를 계단에서 떨어뜨리는 장면이 초반에 등장한다. 편지가 흩어지고 다시 모으는 과정에서 순서가 뒤죽박죽이 된다. 이제 조용한 카페에 앉아 편지를 읽지만, 어느 것이 먼저고 어느 것이 나중인지 도무지 알 도리가 없다. 어쨌든 그녀가 읽는 순서대로 선후가 뒤죽박죽이 된 모리의 이야기가 파편적으로 소환된다.

관객이 아주 멍청하지 않은 이상, 대략의 맥락은 알 수 있다. 모리가 그리워하는 권을 만나러 한국에 왔지만 그녀는 없었고, 그는 인근 게스트하우스에서 묵으며 계속 권을 기다린다. 그런 가운데 같은 게스트 하우스에서 묵는 김의성과 친해지고, 카페 '자유의 언덕'의 여주인 문소리와의 사이에 예기치 않은 로맨스가 번진다. 이런 상황은 앞 뒤 에피소드를 조합해 굳이 재구성하지 않고도 단지 한 두 장면만 보고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까 순차적으로 차근차근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얘기다. 

영화 초반 모리는 문소리에게 자신이 읽고 있는 책이 '시간'에 대한 것이라며 이렇게 말한다.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것이 우리의 두뇌가 만든 개념이고, 사실 그런 건 없다"고. 과연, 영화는 시간의 순차성이 이야기의 형식에 강제하는 방식, 그러니까 인과 관계를 애써 무시한다. 현재가 과거의 결과이고, 미래는 현재의 결과라는 방식의 서사 구조를 붕괴시켜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붕괴된 구조 속에서 등장인물들이 나누는 대화는 굳이 선후 관계를 따질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것이 과거에 속하든 대과거에 속하든, 어쨌든 사람들은 똑같은 말을 약간씩 다른 방식으로 되풀이할 뿐이다. 거기서 홍상수가 어떤 정서를 끄집어내려고 한 것인지는, 관객 각자가 풀어야 할 몫으로 남는다. 

시간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애써 부인하려 드는 이 영화는 일종의 형식 실험이자, 쳇바퀴 같은 언어와 관계와 삶에 대한 홍상수의 선문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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