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코사코브스키 감독론

영화 이야기 2014. 8. 26. 11:18 Posted by cinemAgora

EBS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가 어제 개막했습니다. 올해 심사위원장을 맡은 빅토르 코사코브스키는 세계적인 다큐멘터리 거장입니다. 그의 작품 네 편이 이번 영화제에서 상영됩니다. 제가 영화제 프로그램 노트에 실은 코사코브스키 감독론을 여기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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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러시아 상빼째르부르그(구 소련의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난 빅토르 코사코브스키는 30대 초반에 선보인 데뷔작 <벨로프 씨 가족들>(1993)이라는 작품으로 전세계 다큐멘터리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줬다. 시적 다큐멘터리의 전통을 잇는 가운데서도 리얼리즘과 추상의 세계를 넘나드는 그의 작품 세계는 많은 다큐멘터리스트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혹자는 그를 다큐멘터리의 ‘도그마주의자’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그의 작업 방식이 마치 1995년 라스 폰 트리에 등 일군의 덴마크 감독들이 참여한 도그마 선언을 닮았기 때문이다. 빅토르 코사코브스키가 말하는 그의 다큐멘터리 작업 원칙은 다음과 같다. 

1. 법칙은 없다. 오로지 본능을 따라라. 
2. 영화는 단 하나의 쇼트로 발명됐다. 이야기는 없었다. (뤼미에르 형제의 작품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 1894.) 스토리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난무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구조는 철저히 추상적일 수도 있다. 
3. 인터뷰를 하지 말라. 
4. 예술을 할 때는 두뇌가 필요하다. 하지만 영화를 찍고 있을 때는 머리를 쓰지 말라. 
5. 다큐멘터리에 장면 전환 장치를 넣지 말라. 그렇게 찍지도 말라. 
6. 인생은 되풀이할 수 없다. 순간도 되풀이할 수 없다. 누구에게도 액션을 되풀이하라고 요구하지 말라. 
7. 사람들이 당신을 믿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자연스럽게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8. 때때로 우리는 영화에 무엇을 포함시켜야 할지에 대해 잔인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좋은 사람이라면,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선 안된다. 

이 모든 원칙을 그의 작품들이 철저히 따르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코사코브스키의 작품 속에서는 도그마 감독들이 선언한 바대로 어떤 인위성이나 인공성이 철저히 배제돼 있다. 즉 다큐멘터리스트의 작위적인 개입이 거의 없다는 특징을 보여준다. 이것은 이른바 ‘수행적 다큐멘터리’의 대가인 미국의 마이클 무어가 보여주는 방식과 대척점에 놓여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 어쨌든 그의 작품 세계를 최대한 간단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관찰’ 또는 ‘응시’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설명적 내레이션은 배제돼 있고, 개연성이 없어 보이는 장면들이 이어지면서 관객을 슬쩍 혼란스러움에 빠뜨리기도 한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방식은, 관객들이 다른 차원에서 영화에 몰입할 수 있도록 흥미를 유발한다. 그가 개입을 최소화하고 대상을 관찰하거나 또는 응시하는 방법론을 구사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관객의 능동적 사유와 개입을 요청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의 작품들을 관람하며, 사실상 스토리도 없고, 친절한 설명이 없는 장면과 장면의 연결 틈새를 우리의 해석을 통해 채워야 한다. 그것은 당연하게도, 관객을 사유의 주체로 대우하고자 하는 작가의 필연적인 선택일 것이다. 


데뷔작 <벨로프 씨 가족들 The Belovs>(1993)은 무심한 듯 흐르는 강물을 비추며 시작한다. 어디에 있는 어떤 이름을 가진 강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그저 흐르는 강물을 비추는 화면 위로 조금은 뜬금 없게도 인도 발리우드풍의 음악이 흐른다. 그리고 강아지 한마리가 한 노인의 입과 코 주변을 핥고 있는 장면이 이어진다. 노인이 러시아말을 하면서, 관객은 이 작품의 국적성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영화 내내 목장의 한 집에서 서로 으르렁 거리며 다투는 두 노인의 관계 역시 설명되지 않은 채 흘러간다. 이들의 관계는 영화 후반부에 가서야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서 규명된다. 이 작품에서 벨로프 형제들이 테이블에 모여 구소련과 당대의 러시아 정치 상황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런데 영화는 또 한번 뜬금 없게도, 이 대화가 계속되는 와중에 이들이 젊은 시절에 찍은 가족 사진을 비쳐주는 컷으로 넘어간다. 이것은 촬영 당시 필름이 다 소진되는 바람에 그 장면을 찍지 못했기 때문인데, 코사코브스키는 녹음된 사운드를 그대로 틀어주는 한편 가족 사진으로 화면을 대체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이런 선택은 매우 상징적이다. 작업 과정에서의 돌발 상황 조차, “뭐, 어때” 하는 식의 치기 어리고도 도발적인 편집 방식으로 기록자로서의 진정성을 실어 나른 사례이기 때문이다. 



<조용히 해! Tishe!>(2003) 역시 빅토르 코사코브스키의 독특한 작업 방식을 고스란히 드러낸 작품이다. 이 영화는 코사코브스키의 집 창문에서 내려다 본 거리 풍경을 일 년여간 촬영한 결과물이다. 도로에 구멍이 났고, 이 구멍을 메우기 위한 시 당국의 공사가 진행되는데, 일 년이 넘도록 공사가 끝날 줄을 모른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한 노인이 자신의 개를 찾으러 거리로 나와 연거푸 “Tishe"라고 소리친다. ”Tishe“는 영어로 번역하면 조용히 해!(Quiet)”라는 뜻이다. 우연히 카메라에 잡혔을 이 장면은, 거의 CCTV 화면을 이어 붙인 듯한 이 작품에 순간적으로 매우 익살스럽고도 날카로운 주제 의식을 부여하는 장치로 활용된다. 그럼에도 이 풍자적인 작품은, 관찰과 응시의 대상들을 감독의 의도된 주제 의식에 맞춰 취사 선택하지 않는 미덕을 보여준다. 사랑 싸움을 하고 있는 듯한 젊은이들, 데이트에 나선 남녀, 누군가 경찰에 붙잡히는 현장, 거리를 휘엉청 비추고 있는 달빛, 조용히 떠다니는 풍선 하나 등, 아무런 관련성이 없는 듯한 풍경들이 단지 같은 거리를 배경으로 나열된다. 카메라는 고정된 단 한 곳, 그러니까 코사코브스키의 집 창 안에서 오로지 패닝과 줌인 등의 움직임만을 통해 그 모든 풍경을 담아내는데, 같은 공간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조용하고도 끈질기게 담아낸 이 작품은, 묘하게도 어느 시점에 이르러 그 안에 어떤 스토리가 담겨 있는 것처럼 다가온다. 앞서 말한대로, 관객이 사유의 주체로서 장면의 틈새를 능동적으로 해석했을 때 가능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올해 EIDF에서 소개되는 그의 또 다른 작품 <스비야토 Svyato>(2005)는 이제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아기가 거울이라는 매체를 통해 자아를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통찰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 역시 카메라는 한 곳에 고정돼 아이가 대형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유심히 관찰한다. 마치 아동심리학 실험의 현장을 슬쩍 들여다 보는 듯한 이 작품에서, 코사코브스키는 어쩌면 자신의 원칙에 위배되는 듯한 개입을 영화 말미에 선보이는데, 아기에게 다가가 거울 속에 비친 아기를 가르키며 “이게 누구냐”고 묻는 장면이다. 앞서 언급한 코사코브스키의 다큐멘터리 원칙 가운데 ‘인터뷰를 하지 않는다’는 룰을 깼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 장면은 인터뷰라기보다는 대화에 가깝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어쨌든 <Svyato> 역시 구체적이고도 개별성을 가진 대상에 대한 관찰과 응시를 통해 보편성을 건져 올리는 이 다큐멘터리 거장의 진가를 유감 없이 보여준다. 

빅토르 코사코브스키가 내놓은 작품은 데뷔작 <벨로프 씨 가족들>부터 지난해 나온 <Demonstration>까지 모두 9편이다. 다큐멘터리스트로서 활동한 20여 년의 기간에 비하면 그리 많다고 볼 수 없는 작품이다. 그가 2003년 영국 국립 영화 텔레비전 학교의 마스터 클래스에서 한 이 말을 통해 그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로 영화를 찍을 필요가 있다고 절실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병과 같아요. 영화를 찍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느낌 말이죠.” 따라서 그는 어떤 아이디어를 실제로 영화 촬영으로 이어갈 수 있을 때가지 줄곧 기다리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는 또한 그가 하고 싶지 않은 작품은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누군가 그에게 영국 프리미어 리그팀 첼시의 구단주인 아브라모비치에 대한 작품을 만들어줄 수 있냐는 제안을 했다. 코사코브스키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푸틴은 내게 세 번이나 자신에 대한 작품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지요. 나는 그에 대한 작품을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아브라모비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그가 다작을 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깊은 통찰을 담아낸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원천이기도 할 것이다. 코사코브스키는 전적으로 자신의 자본으로 영화를 찍는다. 전작들의 판매 수익과 각종 영화제에서 받은 상금이 그 원천이다. 그것이 그가 독립영화 정신을 유지하는 가운데, 철저하게 자신의 영화 철학을 밀어 불일 수 있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그는 목소리를 크게 내지 않지만 분명한 목소리를 지닌 작가이자, 전세계의 수많은 독립 다큐멘터리스트들에게 생생한 영감을 안겨주는 선구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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