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3때 친구 녀석이 덜컥 여자 친구를 임신시킨 적이 있었다. 어찌 어찌 낙태 비용을 마련해 여자 친구는 낙태를 했고, 나는 병원에 가지 않은 친구를 대신해 산부인과라는 곳에 처음 들어갔다가 사고(?)의 원흉으로 오인 받아 간호사에게 훈계를 들어야 했다. "그러게 좀 조심하지..."
당시 친구 녀석은 낙태 직후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 이유인즉, "낙태한 여자는 재수 없다"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나는 그 악마 같은 친구와 절교했다.

오늘날에도 많은 여성들이 원치 않는 임신을 한다. 결혼을 했든 미혼이든, 예상치도 못하고, 엄마가 될 준비도 안된 이들에게 덜컥 불청객처럼 찾아온 임신이 여성에게 어떤 정신적 물리적 부담이 될지 남자 입장에서 이해하기란 말만 쉬운 일이다. 태아를 몸에서 분리시키는 수술을 해야 할 때의 심정도 마찬가지다. 

종교, 특히 천주교는 낙태를 금지하고 있다. 한국 역시 실정법상 형식적으로 낙태는 위법이다. 지난 2009년 이 문제와 관련해 헌법 소원이 있었다. 헌재는 여전히 낙태 금지의 손을 들어줬다. "임부의 자기결정권보다 태아의 생명권이 우선"이라는 게 이유였다. 

이 논쟁적인 사안과 관련해 입장을 선뜻 말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낙태와 관련한, 특히나 그 상황을 실제로 경험한 이들의 목소리를 경청해볼 필요는 있다. 

이번주 개봉하는 <자, 이제 댄스타임>(감독 조세영)이 바로 그런 기회를 우리에게 선사한다. 이 작품이 놀라운 것은, 낙태 경험자들을 블러나 모자이크 처리하지 않고, 그대로 얼굴을 노출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을 그 인터뷰에 응한 이들은, 동시에 인터뷰를 통해 자기 인생에 씻을 수 없는 한 순간에 대한 트라우마로부터 탈출을 시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낙태에 대해 찬성하는 건지, 혹은 반대하는 건지 명확한 입장을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앞서 말했듯, 들을 뿐이다. 그 듣는 행위야말로, 우리가 어떤 사안에 대한 입장을 정하기에 앞서 가장 필요한 미덕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자, 이제 댄스타임>은 생각 있는 다큐멘터리가 취해야 할 성찰적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 사회는 젠더로서의 여성에 대해 여전히 너무 무지하다. 그리고 여성의 실존적 환경에 대해서도. 남성 뿐만 아니라 여성들조차 여성성을 억압한다. 그 환경을 한치라도 이해하기 위해 <자, 이제 댄스 타임> 같은 작품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나는 믿는다. 물론, 이런 영화를 제발 좀, 더 많은 관객들이 봐야 하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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