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우 감독의 <음란서생>(2006)이나 <방자전>(2010)은 에로티시즘이 해학과 만났을 때 파생되는 묘한 쾌감을 담고 있었다. 사실 성애와 해학의 결합은 80년대의 그 유명한 <변강쇠> 시리즈나 <뽕> 같은 영화에서부터 면면히 이어져온 한국영화의 또 다른 전통이었다. 그러나 김대우는 그 전통을 이어 받았다기 보다, 즉 80년대 에로 영화들처럼 성애 장면을 위해 특정 시대를 활용했다기 보다 ‘넘어설 수 없는 벽’이라는 극적인 드라마를 만들어내기 위해 시대를 차용한 측면이 강하다. <음란서생>의 윤서(한석규)는 감히 왕의 여자 정빈(김민정)를 넘보다 패가망신의 위기에 놓인다. <방자전>은 잘 알려진 <춘향전>을 슬쩍 각색하며 머슴의 신세였던 방자(김주혁)가 이몽룡의 여자 춘향(조여정)과 사랑을 나눈다는 파격적인 상상력을 도발적으로 밀어 붙인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팽팽한 관계의 긴장이 생긴다. 그 긴장 속에서 피할 수 없는 무언가에 이끌려 서로를 아슬아슬하게 탐하게 되는 상황이야말로, 신분의 벽이나 사대부의 근엄함을 뛰어 넘는, 인간의 보편 욕망으로서의 에로스가 가진 힘을 역설적으로 증거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음란서생>에서 한석규가 내뱉는 이 아름다운 대사가 단지 해학성만이라면 뿜어낼 수 없는 울림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밖은 꽃이 만발 하였습니다. 마마는 저를 놀리셨죠. 그러면서 즐거워하셨습니다. 갑자기 벌이 한 마리 날아들었고, 제가 그걸 쫓아드렸죠. 참 좋은 날이었습니다.”


앞선 두 작품이 신분 질서가 확고했던, 그래서 더 애간장 녹이는 사랑 이야기가 가능했던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했다면, 김대우 감독의 또 다른 시대극 <인간중독>은 좀더 현대에 가까워졌다. 때는 1969년, 베트남 전쟁에서 돌아온 한 장교가 하필 부하 장교의 아내와 치명적인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이다. 시대는 현대로 넘어왔지만, 두 사람의 사랑에는 역시나 신분이 개입한다. 남자 주인공 김진평(송승헌)은 교육대장이자 대령이고, 그가 마음에 품게 된 여자 종가흔(임지연)은 김진평의 부하인 경우진 대위(온주완)의 아내다. 영화는 장교의 아내들이 남편들의 계급에 따라 마치 조선 시대의 내명부처럼 서열 관계에 놓여 있음을 계속해서 보여준다. 따라서 김진평과 종가흔의 불륜 역시 단순한 불륜을 넘어 권력적 상황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음을 시사한다. 그것은 양면적인 장치다. 즉 김진평과 종가흔이 나누는 비밀스러운 사랑의 아슬아슬한 쾌감을 강조하는 장치이면서, 동시에 두 사람의 사랑이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거대한 걸림돌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인간중독>은, <음란서생>과 <방자전>의 연장선에 놓여 있는 작품인 셈이다. <음란 서생>의 윤서가 “다만, 마음속에 음란한 상상이 자리잡아 그것이 사랑인지 아니면 음란한 욕심인지 분간이 아니되었습니다.”라고 고백했듯, 김진평과 종가흔이 나누는 밀회는 사랑인지 육욕인지, 소유욕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 모든 당사자들처럼 그것은 그들 안에서만 그럴 뿐이다. 그들의 사랑은 어쩔 수 없이 세상의 냉엄한 현실과 정면 충돌해야 한다. 

영화 <인간중독>은, 김대우의 앞선 전작들이 뿜어낸 해학성은 많이 약해졌다. 유해진 등의 조연을 동원해 간간히 유머를 뒤섞는 시도를 선보이지만, 해학의 강도가 낮아질 수밖에 없는 건 베트남 전쟁 시기의 군 내부라는 설정 자체가 지나치게 무거운 그릇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김대우는 이 그릇 안에 스스로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을 안겨준다. 영화가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편집의 흐름이 삐걱대고, 김대우 판 <화양연화>가 될 뻔한 영화는 급속도로 힘을 잃는다. 아쉬운 지점이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송승헌과 임지연의 케미컬이 <음란서생>의 한석규와 김민정, <방자전>의 김주혁과 조여정만큼 팽팽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두 사람 다 아름답지만, 두 사람의 사랑이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연출의 문제인지 아니면 배우들의 미숙함인지는, 분간이 되지 않는다.

어쨌든 이 영화를 통해 더욱 분명해지는 것은, 김대우는 사랑의 풍경이 아니라, 사랑과 색욕이 뒤엉킨 함정에 빠져 허우적대는 '남자'에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그의 영화 속에서 로맨틱한 파멸은 언제나 남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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