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은 아버지를 경쟁 상대로 여기면서도 결국 아버지를 닮아간다고 한다. 한편으로 아버지가 강요하는 규범을 극복하는 것이 성장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배웠다. 불행히도 너무 일찍 부친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성장기에 그런 롤 모델을 갖지 못한 나로선 누군가의 아버지가 여전히 생존해 계신다면, 그것 자체로 부러운 마음이 들곤 했다. 

여성들이 느끼는 아버지란 어떤 존재일까. 홍재희 감독이 연출한 다큐멘터리 <아버지의 이메일>(4월 24일 개봉)이라는 작품을 보러 갈 때, 나는 그런 호기심을 지니고 있었다. 어쭙잖게 주워들은 말에 따르면, 여성들은 아버지로부터 남성의 이상형을 형성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한다. 실제로 어린 딸들이, "나는 이 다음에 커서 아빠랑 결혼할거야"라는 말을 하는 경우를 자주 봤다. 그런데 이것은 자상한 아버지의 경우에 해당하는 사례일 것이다.

당연히,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아버지가 무기력하고 폭압적일 때, 그것은 아들은 물론이고 딸들에게도 악몽일 터이다. 그들에겐 아버지라는 존재 자체를 지워 버리고 싶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다큐멘터리의 감독 홍재희의 아버지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14살의 나이에 38선을 넘어 월남한 그는, 반공주의를 삶의 신념으로 안고 살아가면서, 동시에 한국이라는 나라를 떠나고 싶어 했다. 그래서 베트남 전쟁 특수를 누렸고, 사우디에도 일하러 갔다. 그러나 그건 그에게 인생 역전의 기회가 되지 못했다. 그때마다 그는 골방에 틀어 박혀 술을 마셨고, 아내와 아이들을 학대했다.

감독 홍재희는 그런 아버지가 알콜 우울증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난 뒤, 말년에 아버지가 자신에게 보낸 이메일들의 내용을 통해 아버지의 삶을 재구성해 보기로 한다. 당연히 함께 평생을 살았던 어머니의 증언이 앞에 서고, 그 아버지에게 치를 떨며 일찌감치 미국으로 정착지를 옮긴 언니의 애써 무덤덤하면서도 신경질적인 회고가 뒤에 선다. 그들 모두에게 아버지는 결코 훌륭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해와 용서의 단계를 넘어, 그냥 잊어버리고 싶은 거대한 트라우마 같은 존재처럼 보인다. 이미 세상에 없는 아버지조차 딸에게 보낸 이메일을 통해 자신의 삶을 실패한 것으로 규정한다. 

홍재희 감독이 아버지의 삶을 주목하는 시선은, 한 무력한 남자의 초상에 그치지 않는다. 부모의 삶에 "왜?"라는 질문을 던져 보고 역사가 강요하고 시대에 구속된 그 삶의 한계조차 이해 영역 안에 포섭하려고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자식 세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감독은 그 예의를 수행한다. 야심과 한숨을 오갔던 아버지의 삶 속에는 분단과, 반공 이데올로기와, 개발 독재의 흔적이 가부장이라는 이름의 개인에게 깊이 새겨 놓은 움푹한 절망과 좌절의 주름들이 발견된다. 

고로 이 다큐멘터리는 감독의 가족사를 통해 들여다 본 한국 현대사의 굴곡의 단면이라고 볼 수 있겠다. 홍재희는 아버지를 용서했을까? 아마도, 내가 보기에 그의 아버지는 실패한 삶을 살지 않았다. 왜냐면 그 딸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재평가하고 개인과 역사의 상호 작용을 발견하는 다큐멘터리에 중요한 소재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감독 홍재희와 그의 작품 <아버지의 이메일>이야말로 그의 초라해 보였던 삶이 이룬 가장 찬란한 업적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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