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상상을 해 본다. 일본 중세에 아주 훌륭한 사람이 있었다. 한국에서 그를 주인공 삼은 영화를 만든다면? 누구나 말할 것이다. 미친 짓이라고. 한국영화인데 일본이나 중국 감독에게 연출을 맡겼다면 어떨까? 또한 그럴 것이다. 미친 짓이라고. 

프랑스에선 그런 영화가 간혹 만들어진다. 간혹 외국 감독들을 데려다가 자국 영화를 만들기도 한다. 할리우드가 다른 나라 감독들을 자국의 상업영화에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면, 프랑스는 예술영화의 연출을 맡긴다. 지난해 말 개봉한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란 감독을 데려다 만든 프랑스 영화다. 이러니 프랑스를 문화 강국이라 부르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진정한 문화 강국은 돈의 논리가 아니라 다양한 재능에게 멍석을 깔아준다. 자기 시민들의 영혼을 풍성하게 할 수 있다면, 창작자의, 혹은 영화 속 인물의 국적 따위는 따지지 않는다. 

27일 개봉 예정인 <미하엘 콜하스의 선택>이라는 작품도 마찬가지다. 분명 프랑스 영화이고, 배우들도 프랑스어를 쓰는데, 주인공은 독일 사람이다. 바로 독일의 중세사 속에서 주인공을 끄집어냈다. 미하엘 콜하스. 한 귀족의 횡포에 맞섰다가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폭동을 일으켰던 남자. 영화는 이 인물을 통해 이른바 '앙시앙레짐'이라고 불리우는 봉건적 폭력에 저항한 외로운 투쟁을 보여준다. 근대의 동이 트기 전이었기에, 그의 저항은 실패할 게 뻔한 싸움이었다. 그리하여 영화는 중세의 어둠 속에 갇힌 미하엘 콜하스의 먹먹한 표정, 그와 행동을 함께 한 일군의 평민 출신 혁명가들의 암담한 분노와 두려움을 함께 포착하는 데 게으르지 않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위대한 혁명가들이 있지만, 어쩌면 그 혁명가들은, 이름 없이 스러져간 숱한 저항들이 쌓이고 쌓여 축조된 하나의 응축된 아이콘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 <미하엘 콜하스의 선택>은 귀족에게 빼앗긴 말 두 마리에 자존심을 넘어 목숨까지 건 중세의 한 말장수에게 주목함으로써, 이윽고 앙시앙 레짐을 극복하고 시민 사회의 태동을 가능케 한 그 수 많은 희생들 앞에 고개를 숙이며 엄숙한 찬사를 보내는 것이다. 영화가 역사를 바라보는 태도는,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 

한국영화에게 나라 밖의 인물을 주인공 삼은 영화까진 기대하지도 않는다. 연간 관객수 2억 명이 넘는 이 '말로만' 영화 강국에선 하다 못해 임꺽정조차 영화로 만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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