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씨 911>로 잘 알려진 미국의 악동 다큐멘터리스트 마이클 무어의 책 <세상에 부딪쳐라, 세상이 답해줄 때까지>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거기 이런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마이클 무어가 고등학교 때 일입니다.
기숙사 자판기에 좋아하는 감자칩을 사러 갔다가, 거기 붙어 있는 한 연설 대회 공지를 보게 됩니다. 연설의 후원자는 인근 골프 클럽이었고, 연설 주제는 에이브라함 링컨이었죠. 고교생 마이클 무어는 그 골프 클럽이 "백인 전용"이라 아버지가 등록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되죠. 순간 분기탱천한 마이클은 연설 대회에 참가하기로 결심합니다.
고교생 마이클 무어는 연설에 나가 "엘크스 클럽은 어떻게 이런 콘테스트를 후원함으로써 링컨의 고귀한 이름을 더럽힐 수 있는가"라고 비난합니다. 그리고 "우리들 속에서 분리주의자들을 분리하라"고 소리치죠. 그의 연설은 열화와 같은 성원을 이끌어 냈고, 그는 우승 트로피까지 거머쥐었습니다.
그 연설 이후 유력 언론사들이 그를 취재하기 위해 접촉을 시도하죠. 그리고 방송 뉴스에 그의 연설이 소개됩니다. "오늘 미시간주 렌싱에서 17세 소년이 엘크스 클럽의 인종 분리주의적 관행에 관한 연설을 함으로써, 이 지역 클럽들이 아직도 인종을 근거로 한 차별을 합법적으로 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후, 미국에서 암암리에 인종 차별을 해오던 모든 골프 클럽의 '백인 전용' 관행이 금지됩니다.
글의 말미에 마이클 무어는 말합니다. "때로는 감자칩 한 봉지 때문에 변화가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위트 넘치는 겸손이죠. 감자칩이 그의 행동을 이끈 직접적인 계기는 됐을지언정, 그 연설이 위력적 파장을 발휘하게 되는 과정 속에서는 수많은 사회적 요인들이 숨어 있습니다.
일단 후원자들이 뻔히 앉아 있는 곳에서 그에게 상을 준 주최측의 용감무쌍함과, 일개 고교생의 연설에 귀를 기울인 언론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더 결정적으로는, 골프를 좋아하지만 인종차별적 관행을 일삼는 클럽에 등록하지 않은 그의 아버지가 마이클 무어에게 준 가르침 덕분이었겠죠.
이 대목을 읽으며 나는 생각합니다. 부조리에 대한 분노가 사회적 영향력으로 확산되는 그 기제는 결국 그 사회의 도덕적 지표에 달려 있다고 말이죠. 모두가 "그 정도 쯤이야"라고 생각하는 분위기라면 마이클 무어의 용감함은 그냥 어느 청소년의 치기 쯤으로 치부됐을 것입니다.
한국사회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올바름에 대한 예민함을 갖추고 있습니까? 우리의 아이들이 "이건 잘못입니다."라고 말하려고 할 때, "괜히 튀지 말라"고 가르치는 문화는 아닙니까? 내 아이만큼은 탈출시켜 놓고 짐짓 한국의 지옥 같은 교육 현실을 성토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부모들의 비겁함이 그렇게 되물림되는 곳이 대한민국이라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부조리에 대한 분노=세상 모르는 순진함'이라는 등식이 당연시되는 세상에서 살게 되겠죠. 모난 돌이 정을 맞고, 튀는 놈이 뭇매를 맞는 그런 세상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