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관람 불가 판정을 받은 <명왕성>을 오늘 언론 시사로 봤다. 영화를 보고 나니 영상물등급위원회가 왜 이 영화에 청불 판정을 내렸는지를 알 것 같다. 아, 분명히 말하건대, "알 것 같다"이지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영등위원들의 심리 구조 안에서 이 영화가 청소년들에 대한 유해성이 있다고 판단하게 된 근거가 무엇이었는지 알 것 같다는 얘기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의 폭력 묘사는 청소년들이 모방할 여지가 있을만큼 매우 현실적이지도, 그렇다고 잔혹하지도 않다. 그런데도 청소년을 다룬 영화를 청소년은 보지 못하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영화에는 이 사회가 청소년들에게 강요하되 차마 말하지 못하는, 굉장히 불편한 진실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영등위원들은 청소년들이 그걸 확인하는 걸 원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건 씁쓸하게도, 맥락적으로 이 사회의 기득권의 이해와 일치한다. 즉, 99%의 사람들을 우리 속에 몰아 넣고 자기들끼리 경쟁하게 만들면서, 실은 1%의 자신들이 누릴 혜택만큼은 철옹성 속에 숨겨 놓은 것 말이다. 그것만큼은 들키고 싶지 않은, 신자유주의적 욕망 말이다.
영화 <명왕성>은 명문대 입학에 사활을 건 고3생들이 서로를 배제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살풍경을 담아내고 있다. 그런데, 이건 그다지 새롭지 않은 이야기다. 실제 교사 출신인 신수원 감독은, 이 살풍경을 더욱 효과적으로 담아내기 위해 두가지 선택을 한 것 같다. 하나는 숲에서 숨진 채 발견된 전교 1등이 왜 죽었는지를 파헤쳐 들어가는 미스터리적 장치이고, 또 하나는 일등 지상주의에 매몰된 교육 현장을 냉소하는 일종의 우화적 설정이다. 여기서 이 우화를 실어 나르는 게 이른바 비밀 클럽의 존재다. 이건 관객들을 이야기 속으로 흥미롭게 끌어들이면서 그 이야기가 함께 실어나르는 서브 텍스트를 읽게 만드는, 일종의 장르적인 장치다. 말하자면 <여고괴담>에 자주 등장하는 자살한 여고생이 교육 현실을 상징하는 장치로 활용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명왕성>에서 청소년들의 모방을 우려한 영등위원들은 <여고괴담>을 보고 청소년들이 자살 충동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지는 않았을까? 그런 우려를 했다면 그야말로 바보였을 것이다. 다행히 그때는 바보들이 많지 않아서인지 모두 청소년 관람가였다. 그러나 <명왕성>에 대해서만큼은 스스로 바보가 됐다. 왜 스스로 바보가 됐을까? 그건 앞서 말한 이유일 것이다. 그들은 이 영화의 맥락이 싫은 것이다. 왜 이 영화의 배경이 된 엘리트 학교가 보안사 고문실이 있던 자리에 있는지, 그런 상징에 거부감을 느낀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내 상식으로, 이 영화가 청소년 관람불가인 다른 이유를 도저히 상상해낼 수 없다.
교육 현장은 사회 현실을 모방한다. 교실이 폭력적이라면, 그것은 사회가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교실에 왕따가 존재한다면, 이 사회가 왕따를 양산하기 때문이다. 소수자를 배제시키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은연중에 어른들의 부조리를 모방한다.
그리고 <명왕성>은 사회를 모방한 교육 현장을 영화적으로 아주 훌륭하게 모방하고 있다. 영화적 모방에는 상상력이 개입된다. 그 개입된 상상력의 목적은 각성이자 현실적 부조리에 대한 환기이다. 그런데, 영등위원들은 이 개입된 상상력에 의해 소환된 현실 인식이 각성이 아니라 모방을 낳을 것이라는 괴이한 논리를 펼치고 있다. 사실은 자신들의 기준에 이 영화는 불온하다고 믿은 것 같다. 그래서 "모방 우려" 운운하며 핑계를 갖다 붙인 것일 뿐이라는 걸, 영화를 보면서 확인하게 됐다.
아무려나, <명왕성>은 지금까지 한국의 교육 현실을 담아낸 작품 가운데 가장 문제적이다. 청소년 관람불가라고? 이번만큼은 이 땅의 청소년들에게 등급을 무시하라고 말하고 싶다. 나이를 속일 수 없으면 부모님 대동하고 가서 보시라. 생각이 있는 부모라면, 흔쾌히 이 영화를 자녀들에게 보여주시라. 그대들을 정글로 몰아 넣은 이들이 그대들을 괴물로 만들어 놓고, 아니면 산 밑으로 쫓기는 토끼로 만들어놓고, 그걸 얼마나 숨기고 싶어하는지를 이 영화를 통해 확인하라고 말하고 싶다. 7월 11일 개봉.